1. 질문 및 인상깊은 내용

저는 평소에 동시대 미술에서 등장하는 '유령'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자료를 읽으면서 유령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미를 보리스 그로이스의 관점으로 본 예술작품의 실존 이유(?)와 다소 연관지으면서 읽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 실체없고 어딘가 께름칙한 존재를 인간과 어떻게 다른 존재로 규정지을 수 있으며, 동시대 미술에서 '유령'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한 배경이나 지금 여기서 '유령'이라는 키워드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앞으로 계속 알아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이 글에서 저자가 말한 파라오라던지, 현대의 뮤지엄이라고 하는 죽은 자와 산자가 공존하는 공간이 '유령'을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자료에 대한 공부는 '유령'과 연관짓기 보다는 자료를 중점으로 진행하였고 보리스 그로이스의 글은 처음에 부산 비엔날레에서 접했었는데 그때 읽을 때와 시간이 지난 지금과는 또 다른 생각을 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

p.1

"인간의 역사는 욕망된 욕구의 역사이다." 욕망된 욕구는 자의식을 생성하는 것이며, '자아'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첫 문단에서 인상깊은 내용은 '자연적인' 욕구는 항상 자신의 대상을 '부정'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먹는다는 행위는 음식을 통해 나 자신의 영양분을 채우는 관점이기도 하지만, 주체를 바꿔 생각한다면 음식이라는 존재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파괴되는 관점이 된다는 것이 인상깊었습니다. 사물 - 인간(혹은 어떤 생명) 의 관계에서는 항상 이러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인지 궁금한 점이 들었습니다. 사물은 소비되고, 쓸모에 따라 만들어지는데, 인간은 사물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고 사물은 인간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문1. 사물- 인간 간의 관계에서 사물에 의해 인간이 파괴되어지는 관계, 혹은 사물에 의해 인간이 종속되는 관계도 존재할 수 있는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시가 있을까요?

무언가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욕망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 마음이든, 물질이든) 보리스 그로이스의 글에서 유일하게 욕망함으로써 무언가 채워지고 충족되는 관계는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욕구' 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현실세계에서 실현,분출되지 못한 욕망이 '유령'이라는 존재로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학이나 회화에서 묘사되는 유령의 이미지는 모호하거나 특정한 개성, 즉 자아가 드러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욕망된 욕구는 자의식을 생성하는 것이며, '자아'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와 연관지을 때, 유령은 '자아'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특정한 형상보다는 모호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현실과 비현실 세계 간에 오고 갈 수 있는 여지가 열려 있는 즉 보리스 그로이스가 글에서 말한 뮤지엄이라는 공간과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2

자기-디자인과 자기-육체화를 구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과거가 아닌 미래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뜻합니다. (중략) 우리는 우리가 어떤 형태로 죽음에 이를지에 관심을 둡니다.

여기서 '자기-디자인과 자기-육체화를 구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뒷부분 내용에서 우리는 죽음 후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기를 바란다는 욕망이 존재함을 말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와 함께 죽어서도 기억된다는 욕구가 공존함을 말하면서 타인의 기억에 남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테러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게 흥미로웠습니다.(하지만 실제로 그러면 안되겠죠..) 이후 테러범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간의 유사점으로 선언문을 쓴다거나, 그들에 관한 모든 기억과 자료들이 수집되고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을 그들 간의 공통점으로 꼽습니다. 수많은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도시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복합적으로 능동적이기도 하면서 수동적이기도 한, 그들에 관한 하나의 내러티브가 형성되게 된다는 점도 인상깊었습니다.

p.4

사람들이 자신의 아날로그적인 신체가 죽고 나서도 디지털적, 가상적 신체가 디지털 클라우드 어딘가에 살아남아 지구상의 어떤 유저에 의해 소환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오늘날 디지털 클라우드는 전통적으로 천국이라고 여겨졌던 것을 대체했습니다.

죽음 이후 우리에 대한 정보와 기억은 디지털 클라우드를 더돌면서 두번째 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클라우드 뿐만 아니라, 글에서도 말했듯이 피라미드를 대체하는 집단적 뮤지엄에 소장될 것이라고 합니다. 죽으면 자신의 '자기-디자인'이 남겨진다는 말은 자신에 대한 데이터들이 영혼을 대신하고, 데이터들을 매개하는 매개체가 신체성을 지니게 된다고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죽음 이후의 자기- 디자인이 포스트휴먼의 조건과 연결되면서, 자기-디자인이 자연적 신체 대신 영원불멸성을 획득하는 새로운 인공 신체를 획득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공 신체는 인간이 생산하고 수집하는 것들로 이뤄진다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멈춰있기보다는 끊임없이 세계를 순환하고 시간에 의해 변화하면서도 사라지거나 썪지 않고 보존되는 특성을 가진다고 느껴졌습니다. 저는 여기서 다시 '유령'과의 연관성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동시대의 세계에서 '유령'이라는 이미지가 지시하는 상징성은 포스트휴먼적인 맥락과 닮아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체적이고 특정되지 않는 신체를 가지면서도, 디지털 클라우드에서도 살아 숨쉬며, 어떤 특정 사물에 그것이 깃들기도 하는 그것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인 <가장의 근심>에 등장하는 '오드라데크'를 떠올리게 합니다. 소설에 나오는 '오드라데크'는 인간의 규정됨에 반하면서 어떤 의도나 의미로 귀결되지 않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별모양의 실타래처럼 생긴 형체를 가졌지만 그것에 대한 용도를 알 수 없고, 살아 숨쉬는 것 같지만, 유기체로 명명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에 죽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존재하는 곳은 인간이 보통 쓸모없다고 여기거나 쓸모를 유예해둔 공간에 출몰합니다. 살아있는 인간은 이 대상을 인식하고 명명할 수 없음에 비애를 느낀다고 적혀있는데 저는 보리스 그로이스의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 에서 말하고자 하는 포스트휴먼적 맥락의 사회 구성원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영원불멸성이 이런 비애로부터 출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자기- 디자인을 하는 이유가 살아서는 타인의 욕망을 바라는 욕구에서 시작되어 그것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객관적 이미지를 확보하고, 그리고 죽어서는 자신에 대한 데이터가 디지털 클라우드나 뮤지엄 같은 공간에 남아 떠돈다는 가정이 결국 잊혀지지 않고 싶어하는 태초의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드라데크에게는 욕망이라던지, 존재 의의, 혹은 그가 하는 행위에 대한 목적이 없으며 죽음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이 대상을 통해 자신의 유한함, 잊혀져야만 하는 운명을 깨닫고 비애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것들 간의 차이가 '유령'이라는 충돌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을 정리하였습니다. 질문은 위에 하나로 뽑았습니다. 이것저것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들을 주절주절.. 적어봤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오드라데크 내용 관련해서는 '아마도 예술공간'의 제9회 아마도전시기획상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에서 참고하였습니다! 벌써 워크숍 3회차가 다가오는데 시간이 참 빠르네요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