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trong>The Value of Painting: Notes on Unspecificity, Indexicality, and Highly Valuable Quasi-Person</strong></p>
<p>Isabelle Graw</p>
<p>그림의 가치 : 불특정성, 지표성, 고(부가)가치의 유사-인물에 관한 노트</p>
<h3>(희민)</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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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1. Introduction</strong></p>
<p>In the following I will first try to develop a medium-unspecific notion of painting /that is nevertheless able to capture its residual distinctness even under the conditions /that led to its diffuse boundaries. These conditions will be addressed in view of their implications for painting. If painting has expanded and tends to be everywhere, as I will argue, then it seems to make little sense to delimit its realm. Yet this is what numerous painting exhibitions, keep doing: they treat painting as if it was a clearly circumscribed entity. However, painting has long since left its ancestral home — that is, the picture on the canvas — and is now omnipresent, as it were, and at work in other art forms as well.</p>
<p>We therefore cannot be sure what we are referring to when we talk "about painting."<strong>1 </strong>Do we mean painting in the sense of a medium, a technique, a genre, a procedure, or an institution? As a way out of these semantic quandaries, I will propose a less substantialist notion of painting: a form of production of signs that is experienced as highly personalized. This understanding of painting as highly personalized semiotic activity has several advantages—it is less restrictive, allowing us to see how painting is at work in other art forms as well, and it is able to capture what is specific about painting's codes, gestures, and materiality.<br></p>
<p><strong>1</strong> "About painting" was the title of the 2011 art fair/exhibition abc - art berlin contempora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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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1.개요</strong></p>
<p>이 글에서 나는 먼저 장르적 경계가 확장된 동시대 매체 환경의 조건들 속에서도 여전히 특수성을 간직한 회화의 매체-불특정성에 대해 규명하려 한다. 종종 '포스트 미디엄 컨디션'(로잘린드 크라우스)이라 언급되는 이 조건들은 그것이 회화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다루어질 것이다. 만약 회화의 장이 확장되었고, 따라서 그림이 어디에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의 영역을 한정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깨진 거울" (Deichtorhallen Hamburg and Kunsthalle Wien, 1993)에서 “Painting on the Move" (Kunsthalle Basel, 2002)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회화 전시 또는 파이돈이 제작한 악명 높은 출판물들 (Painting Today, 2009)이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바이다. 그들은 회화가 명확하게 제한된 매체인 양 위협한다. 그러나 회화는 이미 오래 전에 조상들의 터전인 캔버스를 떠나 지금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다른 예술 형태로도 작동하고 있다.</p>
<p>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회화에 대해” 말할 때 무엇을 언급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strong>1</strong> 우리가 회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매체, 기술, 장르, 과정, 혹은 기관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의미론적 곤경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나는 그림에 대한 조금은 덜 실재론적인 개념을 제안할 것이다. 그것은 <strong>회화를 고도로 개인화된 것으로 경험되는 표지의 생산 형태로 이해하는 것</strong>이다. 회화를 고도로 개인화된 기호학적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즉, 회화가 다른 예술 형태에서도 어떻게 작동하는지 볼 수 있도록 하고, 회화의 코드, 제스처 및 물질성이 갖는 특수성을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p>
<p><strong>1</strong> "About painting" 은 아트페어이자 전시인 2011년 abc-아트 베를린 컨템포러리의 제목이었다.</p>
<p><br>In addition to this, the focus on painting's indexicality enables us to grasp the particularly strong bond that we encounter between the person and the product. This bond has been of particular relevance for anthropology, which tends to repped artworks as equivalents of people.<strong>2 </strong>While this view underestimates the fact that the two groups function differently in many respects, I nevertheless find Alfred Gell's definition of artworks as "indexes of agency" very useful.<strong>3</strong> Painting takes this aspects of artworks—that they are perceived as social indexes—to the very extreme. In order to argue painting's particular ability to suggest social agency, I will investigate the highly personalized nature of this particular sign production and relate it to the way it obtains value.<br></p>
<p>There are many indications of painting's lasting popularity: we keeps fetching the highest prices on the art market and it survived the manifold historical attempts to declare it finished, dead, obsolete, etc, I will conclude by offering one possible explanation for its tenacity. Granted, there are other, more pragmatic reasons for its lasting popularity that I won't elaborate on here (such as the easy transport and circulation of pictures on canvas). Moreover paintings are usually based on comparatively low production costs, which also contributes to their attraction. But I am more interested here in the powerful suggestion that painting is able to produce as an art form: I will argue that it is particularly disposed to support the expectation—wiespread in the art world—that acquiring a work of art means getting a hold on the artist's labor capacity and therefore owning a slice of her life. Buying artworks indeed comes close to buying people—and this is especially true for painting.</p>
<p><strong>2</strong> Alfred Gell, Art and Agency: An Anthropological 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7.</p>
<p><strong>3 </strong>Ibid., 17.</p>
<p>여기에 더해, 회화의 지표성에 초점을 맞추면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유독 강한 유대감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유대감은 특히 예술작품을 사람과 동등한 것으로 만드는 인류학과 관련이 있다.<strong>2</strong> 이러한 견해는 두 그룹이 많은 면에서 다르게 기능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술작품을 "대리의 지표"로 정의한 알프레드 겔의 정의가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strong>3</strong> 회화는 예술작품의 이러한 측면들, 즉 그것들이 사회적 지표로 인식되는 것을 강하게 받아들인다. 회화가 <strong>사회적 대리물로 기능하는 </strong>특별한 능력에 대해 논하기 위해, 나는 이 특정한 표지 제작의 고도로 개인화된 성격을 조사하고 그것이 가치를 생산하는 방법과 연관시킬 것이다.</p>
<p>여기에 더해, 회화의 지표성에 초점을 맞추면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유독 강한 유대감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유대감은 예술작품을 사람과 동등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인류학과 특히 관련이 있다.<strong>2</strong> 이러한 견해는 두 그룹이 많은 면에서 다르게 기능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술작품을 "대리의 지표"로 정의한 알프레드 겔의 정의가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strong>3</strong> 회화는 예술작품의 이러한 측면들, 즉 그것들이 사회적 지표로 인식되는 것을 강하게 받아들인다. 회화가 <strong>사회적 대리물로 기능하는 </strong>특별한 능력에 대해 논하기 위해, 나는 이 특정한 표지 제작의 고도로 개인화된 성격을 조사하고 그것이 가치를 생산하는 방법과 연관시킬 것이다.</p>
<p>그림의 지속적인 인기는 여러 조짐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미술 시장에서 그림을 계속 최고의 가격으로 팔고 있고, 그림의 종말, 죽음, 쓸모없음 등을 선언하려는 다양한 역사적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나는 이 <strong>끈기/지속성</strong>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설명을 제시하며 글을 마무리 할 것이다. 물론 회화가 살아남은 데에는 내가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다른, 더실용적인 이유들이 있다(예를 들면, 캔버스의 쉬운 운반과 유통). 게다가, 그림은 보통 상대적으로 낮은 제작비를 기반으로 하는데, 이것 또한 그림의 매력을 더해준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그림이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려 한다. 특히, 작품을 얻는 것이 예술가의 노동력을 장악하고, 따라서 그녀(작가의) 삶의 한 부분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예술계에 널리 퍼져있는 기대를 회화가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strong>미술품을 사는 것은 정말로 사람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strong>. 그리고 이것은 특히 그림에 있어 진실이다.</p>
<p><strong>2</strong> Alfred Gell, Art and Agency: An Anthropological 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7.</p>
<p><strong>3 </strong>Ibid., 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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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2. For an Expanded Notion of Painting</strong></p>
<p><br>I have already hinted at the problems of defining painting. When most artistic practices, not only painterly ones, have undergone massive differentiation and expansion, it becomes rather difficult to pin down painting. How do we determine an “unresolved category"?<strong>4</strong> I would like to suggest that we work with an expanded notion of painting that breaks with the modernist understanding of it as a clearly delineated practice characterized by given norms and conventions. Since the borders between the different art forms have become permeable, at least since the 1960s, we have found ourselves in a situation where different media relate to, refashion, and remodel each other. This process has been termed "re-mediatization,"<strong>5</strong> and occurs when the features that have been ascribed to one medium—for instance, flatness or representational strategies in painting—are addressed by another medium—for instance, large-scale photography.<strong>6</strong> And sure enough, artists from Jeff Wall to Wolfgang Tillmans have tirelessly demonstrated to us that photography can take up the representational and narrative strategies of painting; that it can aim at creating surfaces that suggest the materiality of abstract painting.</p>
<p>The crucial point remains here that the modernist idea of an art that is defined by the "essence of its medium' has clearly lost its relevance. Once the medium can no longer be delimited, then no qualities can be inherent to it. Its character, rather, depends on how the artist will proceed with it.</p>
<p><strong>4</strong> Quoted from the press release of the exhibition "Nikolas Gambaroff, Michael Krebber, R. H. Quaytman, Blake Rayne* at Bergen Kunsthall, November 5-December 22, 2010.</p>
<p><strong>5</strong> See Ilka Becker, " The Image as Revenant: Retroactivity and Remediation in the Works of T.J. Wilcox," trans. Michael Lattek,<em> Texte zur Kunst</em>, no. 79 (December 2009): 126-31.</p>
<p><strong>6</strong> Michael Fried has written a whole book about how the former themes that he detected in eighteenth-century painting—absorption, theatriciality—are now taken up by contemporary photographers. Michael Fried, "Introduction," in Why Photography Matters as Art as Never Before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8), 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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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2. 확장된 회화의 개념을 위해</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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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나는 이미 그림을 정의하는 문제의 어려움에 대해 암시했다. 화가로서의 행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예술적 행위들이 엄청난 분화와 확장을 겪었을 때, 그림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오히려 어려워진다. 우리가 이 "확인되지 않은 범주"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strong>4</strong> 나는 우리가 주어진 규범과 관습으로 특징지어지는 명확한 관행으로서의 모더니즘적 이해를 깨는 확장된 회화의 개념을 가지고 일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늦어도 1960년대 이후부터 서로 다른 예술 형태 사이의 경계가 유연해지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미디어가 서로 관련되고, 재유행하고, 서로를 재구축하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은 "재매개화"라고 불리며,<strong>5</strong> 한 매체에 귀속된 특징들(예를 들어, 평면성 또는 회화에서의 재현적 전략)이 다른 매체에 의해 다루어질 때 발생한다(예를 들어, 대규모 사진처럼) <strong>6</strong> 그리고 당연하게도, 제프 월에서 볼프강 틸만스에 이르는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사진이 회화의 재현적, 서술적 전략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입증해 왔다. 달리 말해, 사진이 추상 회화에서의 물질성을 제시하는 표면을 만드는 것을 목표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p>
<p>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술을 "그 매체의 본질"에 의해 정의하는 모더니즘적 사고는 분명히 그 시의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일단 매체를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하면, 매체의 고유한 특성이란 있을 수 없다. 매체의 특성은 오히려 예술가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p>
<p><strong>4</strong> Bergen Kunsthall에서 2010년 11월 5일에서 12월 22일까지 열린 전시 "Nikolas Gambaroff, Michael Krebber, R. H. Quaytman, Blake Rayne"의 보도자료에서 인용함.</p>
<p><strong>5</strong> Ilka Becker, " The Image as Revenant: Retroactivity and Remediation in the Works of T.J. Wilcox,"를 참고할 것. 번역. Michael Lattek,<em> Texte zur Kunst</em>, no. 79 (December 2009): 126-31.</p>
<p><strong>6</strong> 마이클 프리드는 그가 18세기 그림에서 감지한 흡수와 연극성이라는 주제가 현대 사진 작가들에 의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한 단행본을 썼다. Michael Fried, "Introduction," in Why Photography Matters as Art as Never Before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8), 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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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3. Good-Bye to Medium-Specificity?</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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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lement Greenberg was the leading champion of the idea that modernist painting in particular is not only characterized by "essential norms and conventions" such as the flatness of its surface, but that each painting has to ideally criticize these limitations "from the inside."<strong>7</strong> It is interesting to note how the descriptive and the normative levels merged in his notion of the medium. Not only did he essentialize painting, ignoring the fact that it actually shares its supposedly essential condition—the flat surface—with writing, he moreover expected the artist to defend the imaginary purity of her medium by criticizing it from within.</p>
<p><br>Now, this privilege that Greenberg had accorded to the medium became historically untenable once painting lost its purity and expanded into life, as in the Combine paintings of Robert Rauschenberg. Greenberg's position became even more questionable when those Conceptual art practices emerged in the late 1960s that strongly relied on different technologies, such as film photography or diagrams. This was an art that was more generic than medium specific, as André Rottmann has rightly pointed out.<strong>8</strong> One might add to this that the rejection of the</p>
<p>privileged status of painting has a much longer history, and regularly occured in painterly practices as well. As an example of a painting that says good-bye to the tradition of “pure painting,” I would refer to Francis Picabia’s Nature Morte(1920).</p>
<p><strong>7</strong> Clement Greenberg, Modernist Painting," in Clement Greenberg: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4, <em>Molemim with a Vengeance</em>, 1957-1960, ed. John O'Bria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89, 85.</p>
<p><strong>8</strong> André Rottmann "Networks, Techniques, Institutions: Art History in Open Circuits, <em>Texte zur Kunst</em>, no. 81 (March 2011): 142- 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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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3. 매체 특정성과의 작별</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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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특히 회화가 평면성과 같은 "필수적 규범과 관습"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모더니즘 사상 뿐만 아니라, 각 회화가 이러한 한계를 "내부로부터" 이상적으로 비판해야 한다는 사상의 선도적인 옹호자였다.<strong>7</strong> 매체에 대한 그의 관념이 서술적, 규범적 층위와 어떻게 합쳐지는지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는 그림을 본질화하고, 그것이 실제로 필연적인 상태, 즉 평평한 표면을 글쓰기와 공유한다는 사실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그것을 내부에서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매체에 대한 <strong>망상적</strong> 순수성을 옹호할 것이라고 기대했다.</p>
<p>이제 그린버그가 매체에 부여했던 이 특권은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Combine paintings에서처럼 그림이 순수성을 잃고 삶으로 확장되면서 역사적으로 수호될 수 없게 되었다. 그린버그의 입장은 1960년대 후반에 영화 사진이나 다이어그램과 같은 다른 기술에 강하게 의존하는 개념 미술이 등장했을 때 훨씬 더 의심스러워졌다. 앙드레 로트만이 올바르게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은 매체 특정적이기보다 더 일반적인 예술이었다.8 누군가는 여기에서 회화의 특권적 지위에 대한 거부감은 훨씬 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화가로서의 <strong>행위 차원</strong>에서도 정기적으로 일어 왔다고 첨언할 수 있다. ‘순수 회화'의 전통에 작별을 고하는 그림의 예로는 프란시스 피카비아의 Nature Morte(1920)를 들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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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7</strong> Clement Greenberg, "Modernist Painting," in <em>Clement Greenberg: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em>, vol. 4, <em>Molemim with a Vengeance</em>, 1957-1960, ed. John O'Bria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89, 85.</p>
<p><strong>8</strong> André Rottmann "Networks, Techniques, Institutions: Art History in Open Circuits, <em>Texte zur Kunst</em>, no. 81 (March 2011): 142- 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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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he painting contaminates the alleged purity of its medium by drawing on different formats: the readymade (in the form of the stuffed animal attached to the surface that "stubbornly clings to the domain of painting," as George Baker no adequately put it) and text (the written names of "great" male artists like Cézanne, Rembrandt, and Renoir, whose portrait we are meant to see and who turn out to be nothing but a dead animal, natures mortes).9 Cézanne, for one, whose work was always considered to be the epitome of pure painting, is declared to be as dead as the stuffed ape. The status of painting as a higher art form and the correlating belief in its purity and essence are doubly threatened here: not only by the incorporation of a ready made that enforces the external logic of the commodity and productive labor into the painting, but also by the textual elements, which equally threaten to bury painting's alleged essence.</p>
<p>Are we then obliged to deduce from this that there is nothing medium specific about painting anymore? I believe that we have to concede at this point that some artists, and painters in particular, do indeed encounter problems in their practice that they ascribe to the specificity of their respective medium. But it is one thing to acknowledge a certain degree of medium-specificity at this level of artistic production, and another to derive a highly questionable general norm of medium-specificity from i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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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9</strong> George Baker, "The Artwork Caught by the Tail: Dada Painting" in The Artwork Caught by the Tail: Francis Picabia and Dada in Paris (Cambridge, MA: MIT Press, 2007), 101.<br></p>
<p>이 그림은 (조지 베이커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박제 동물의 형태를 연상시키며 "그림의 영역에 완고하게 달라붙는”, ) 레디메이드와 (우리가 보게 될 세잔, 렘브란트, 르누아르와 같은 "위대한" 남성 예술가들-죽은 동물이자 네이처 모르테에 불과한-의 초상화 위에 적힌 이름들과 같은)<strong>9</strong> 텍스트라는 다른 형식으로 그려냄으로써 매체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 예를 들어, 언제나 순수 회화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세잔은 박제된 유인원처럼 죽었다고 선언된다. 여기서 상위 예술 형식로서의 회화의 지위와 그와 결부된 회화의 순수성과 본질에 대한 믿음은 상품이라는 외부 논리와 생산적인 노동을 그림에 강요하는 레디메이드(ready made)와의 통합뿐만 아니라—마찬가지로 그림의 본질을 묻어버릴 위험이 있는—텍스트 요소들에 의해서 이중으로 위협받고 있다.</p>
<p>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회화에 더 이상 매체적 특징이 없다는 것을 추론할 의무가 있는가? 나는 이 시점에서 일부 예술가들, 특히 화가들이 각자의 매체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실제적인 문제에 직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적 생산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매체 특이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로부터 매우 의심스러운 일반 규범을 도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p>
<p><strong>9</strong> George Baker, "The Artwork Caught by the Tail: Dada Painting" in The Artwork Caught by the Tail: Francis Picabia and Dada in Paris (Cambridge, MA: MIT Press, 2007), 101.<br></p>
<p><strong>4. Painting and Indexicality</strong><br></p>
<p>So, how to define painting once it has merged with other procedures—from the readymade and linguistic propositions to the insights of institutional critique? How to determine practice that renders impossible the rigorous distinction between what is intrinsic and what is extrinsic to it? I want to propose that we conceive of painting not as a medium, but as a production of signs that is experienced as highly personalized. By focusing on painting's specific indexicality, we will be able to grasp one of its main characteristics: it is able to suggest a strong bond between the product and the (absent) person of its maker. This is due to the way indexical signs actually operate: According to Charles S. Peirce, an index shows something about a thing because of its <em>physical connection</em> to it.<strong>10</strong> Since he mentioned photography as an example for this "class of signs," art historians tend to mainly treat photography as the indexical art form par excellence.<strong>11</strong> But I would argue that painting suggests such a physical connection even more strongly. Someone has left her marks.</p>
<p>Frank Stella's observation that painting is a sort of handwriting was actually quite to the point.<strong>12 </strong>Its signs are indexical insofar as they can be read as traces of the producing person. Now even if we opt for a deconstructionist approach, insisting how the trace equally addresses "the formal conditions of separation, division, and deferral,”<strong>13</strong> we are still dealing with the ghost of a presence. This is also true for those paintings that avoid hand-writing by using a technical device, as in Gerhard Richter's abstract paintings produced with a squeeg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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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10</strong> Charles S. Peirce, “What Is a Sign?”, in <em>The Essential Peirce: Selected Philosophical Writings</em> vol 2, 1893 -1913, ed. The Peirce Edition Project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8), 9.</p>
<p><strong>11</strong> See Rosalind E, Krauss, Notes on the Index: Seventies Art in America,” <em>October</em> 3 (Spring1977): 68-81.</p>
<p><strong>12</strong> Bruce Glaser, Questions to Stella and Judd,” in<em> Minimal Art: A Critical Anthology</em>, ed. Gregory Battcock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157.</p>
<p><strong>13</strong> Jacques Derrida, quoted in Rosalind B. Krauss, “Six," in<em> The Optical Unconscious</em> (Cambridge, MA: MIT Press, 1993), 2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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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 페인팅과 지표성</p>
<p>그렇다면, 회화가 다른 절차와 병합되면, 즉 레디 메이드와 언어적 명제에서 제도적 비평의 통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내재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관행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나는 우리가 그림을 매체가 아니라 고도로 개인화된 표지의 생산으로 인식한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림의 특정 지표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strong>사물</strong>과 (부재하는) 제작자 사이의 강한 유대를 암시한다는 주요한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인덱스 부호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 때문이다. 찰스 S. Peirce에 따르면, 색인은 사물에 대한 무엇인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색인이 사물과 물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하다.<strong>10</strong> 그가 사진을 이 "부호의 종류"에 대한 예로 언급했기 때문에, 미술 역사가들은 사진을 탁월한 지표적 예술 형식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strong>11</strong> 그러나 나는 그림이 그러한 물리적 연관성을 훨씬 더 강하게 시사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누군가가 자신의 흔적(지표)을 남겼다.</p>
<p>그림은 필적의 일종이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관찰은 사실 꽤 요령 있었다.<strong>12</strong> 그 부호는 제작자의 흔적으로 읽을 수 있을 만큼 지표적이다. 이제 우리가 그 흔적이 어떻게 "분리, 분열, 연기의 형식적 조건"을 동등하게 다루는지 주장하는 해체주의적 접근을 선택하더라도 <strong>13</strong> 우리는 여전히 존재의 유령을 다루게 된다. 이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적인 그림에서처럼 기술적인 장치를 사용하여 필적을 피하는 그림에도 해당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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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10</strong> Charles S. Peirce, “What Is a Sign?”, in <em>The Essential Peirce: Selected Philosophical Writings</em> vol 2, 1893 -1913, ed. The Peirce Edition Project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8), 9.</p>
<p><strong>11</strong> See Rosalind E. Krauss, Notes on the Index: Seventies Art in America,” <em>October</em> 3 (Spring1977): 68-81.</p>
<p><strong>12</strong> Bruce Glaser, Questions to Stella and Judd,” in<em> Minimal Art: A Critical Anthology</em>, ed. Gregory Battcock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157.</p>
<p><strong>13</strong> Jacques Derrida, “Six," in<em> The Optical Unconscious</em> (Cambridge, MA: MIT Press, 1993), 260 에서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인용.</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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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y moving the squeegee up and down the painting in a particular way, Richter inscribes his own body movement into the painting. In other words, attempts to eliminate the subjectivity of the artist into painting.<strong>14</strong> And the more negation there is of handwriting, the more this negation will be considered to be the handwriting of the artist.<strong>15 </strong><br></p>
<p>Yet linking indexicality to painting does not imply that we ignore the split that occurs between the artwork and the authentic self. What we encounter in painting is not so much the authentically revealed self of the painter, but rather signs that insinuate that this absent self is somewhat present in it. As a highly mediated idiom, painting provides a number of techniques, methods, and artifices that allow for the fabrication of the impression of the author's quasi-presence as an effect.</p>
<p>For this indexical effect to occur, the artist does not need to have literally set her hand on the picture, or to have brandished a brush, or to have thrown paint on it. A mechanically produced silkscreen by Andy Warhol, who often delegated his work to his assistants, or a printed black painting by Wade Guyton, is no less capable of conveying the sense of a latent presence of the artist—by virtue, for instance, of imperfections deliberately left uncorrected, selected combinations of colors, or subsequent improvements. Painting, then, would have to be understood as the art form that is particularly favorable to the belief—widespread in the visual arts more generally—that by approaching or purchasing a work of art, it is possible to get a more immediate access to what is assumed to be the person of the artist and her life.<br></p>
<p><strong>14</strong> See Isabelle Graw, " The Knowledge of Painting: Notes on Thinking Images, and the Person in the Product," trans. Gerrit Jackson, Texte zur Kunst, no. 82 (June 2011): 114-25.</p>
<p><strong>15</strong> "Noch [kann] die Wahl eines Mediums, das Handschriflichkeit ausdrücklich negiert, Ausdruck (oder 'Medium') eben der Handschrift eines Künstlers sein." Michael Luthy and Christoph Menke, "Einleitung," in <em>Subjekt und Medium in der Kunst der Moderne</em>, ed. Michael Lüthy and Christoph Menke (Zurich: diaphanes, 2005), 9.</p>
<p></p>
<p>리히터는 특정한 방식으로 스퀴지를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그림에 새겨넣는다. 이는 회화에서 작가의 주관성을 제거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필적에 대한 부정이 강할수록 이 부정은 화가의 필적으로 간주될 것이다.<strong>15</strong><br><br>그러나 지표성을 그림과 연결시킨다고 해서 예술작품과 진정한 자아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회화에서 마주치는 것은, 진정으로 드러난 화가의 자아라기 보다는 그의 부재한 자아가 어느 정도 그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호들이다. 고도로 매개된 관용구로서, 회화는 효과로서 작가의 유사 존재의 인상을 조작할 수 있는 많은 기술, 방법론, 그리고 기교를 제공한다.<br><br>이러한 지표적 효과가 일어나기 위해 작가는 말 그대로 그림에 손을 대거나 붓을 휘두르거나 물감을 던질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그의 작업을 조수에게 자주 위임했던 Andy Warhol의 기계적으로 제작된 실크스크린이나 Wade Guyton의 인쇄된 검은색 그림 속 의도적으로 수정되지 않은 결함들이나 선택된 색상의 조합 또는 그에 <strong>조형적 전개</strong>는 예술가의 잠재된 존재감을 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회화는 예술 작품에 접근하거나 구입함으로써 예술가와 그녀의 삶으로 추정되는 것에 더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시각 예술에서 일반화된 믿음에 유리한 예술 형태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p>
<p><strong>14</strong> Isabelle Graw의 " The Knowledge of Painting: Notes on Thinking Images, and the Person in the Product," trans. Gerrit Jackson, Texte zur Kunst, no. 82 (June 2011): 114-25 을 참고할 것.</p>
<p><strong>15</strong> "Noch [kann] die Wahl eines Mediums, das Handschriflichkeit ausdrücklich negiert, Ausdruck (oder 'Medium') eben der Handschrift eines Künstlers sein." Michael Luthy and Christoph Menke, "Einleitung," in <em>Subjekt und Medium in der Kunst der Moderne</em>, ed. Michael Lüthy and Christoph Menke (Zurich: diaphanes, 2005), 9.<br></p>
<h3>(나하)</h3>
<p></p>
<p><strong>V Painting as a Thinking Subject</strong></p>
<p>생각하는 주체로서의 회화<br></p>
<p>'There is one feature of the indexical sign that I have not yet mentioned: according to Peirce, the indexical sign is able to capture our attention because it is affected by the power of its object. *• Now, in the case of painting's indexicality, this object is a subject- the person of the artist. This is why painting can be potentially experienced as being intriguing in a way that only an intriguing person could be. You might object that sculpture is able to do exactly the same thing. Isn't sculpture marked by a similar kind of indexicality and it therefore also suggest that it is a quasi-person?<strong>17</strong></p>
<p>'내가 아직 언급하지 않은 지표 기호의 한 가지 특징이 있다. Peirce에 따르면 지표 기호는 대상의 힘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의 주의를 끌 수 있다. *• 이제 회화의 지표성(indexicality)의 경우 이 대상은 주체, 즉 작가의 인격이다. 이것이 바로 그림이 흥미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흥미로운 것으로 잠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이유다. 조각품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반대할 수도 있다. 조각품도 이와 유사한 지표성을 갖고 있어 유사-인물임을 시사하지 않는가?<br></p>
<p><strong>16</strong> An index is a thing which having been forcibly affected by its object, forcibly affects its interpretant and causes that interpretant to be forcibly affected by the object, and to affect, (Ch interpretant in turn; and which, further, so Far as if is a sig0, becomes a sign in this wah Charles S, Peirce, 1902, The Papers of Charles S. PelIce, R 509, Floughion Library, Harrard</p>
<p>인덱스(지표)는 대상에 의해 강제적으로 영향을 받아 해석자에게 강제로 영향을 미치고 해당 해석자가 대상에 의해 강제로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p>
<p><strong>17</strong> The term quasi-person evokes Bruno Latour's actor-network-theory and his understanding of things as "quasi-objects" or "actants." Latour famously proposed that objects are to be recognized as taking part in actions. They do not act as such- they have their role to play in the course of an action. While I find his call for considering objects decisive for an action interesting, I am less sure of his overall project that attacks critical sociology. By replacing the concept of "society" with a more progressive-sounding "collective" that includes nonliving objects as well, the different action potentials of subjects and objects are underestimated as much as the power relations and hierarchies between subjects are left out of sight. See Bruno Latour,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p>
<p>유사-인물이라는 용어는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이론과 사물을 "준 대상" 또는 "행위자"로 이해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Latour는 물체가 행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행동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있다. 나는 행동을 위해 결정적인 대상을 고려하라는 그의 요청이 흥미롭다고 생각하지만 비판적 사회학을 공격하는 그의 전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사회"라는 개념을 무생물도 포함하는 보다 진보적인 "집단"으로 대체함으로써 주체 간의 권력 관계와 위계가 보이지 않는 만큼 주체와 객체의 다른 활동 잠재력이 과소 평가된다.<br></p>
<p>Yes, it does, but to a lesser degree. Only painting has many historical arguments pointing to its subject-like power--arguments that I believe do reach into our present. The very first systematic treatise on painting produced in the modern era, for instance, Leon Battista Alberti's Della pittura (1453), already aimed to raise the reputation of painters in order to advance their emancipation from the larger class of craftsmen. Indicatively enough, Alberti based his preference for the painter over the sculptor on his view that the former worked with more difficult things,"'S thereby implying that painting possesses a challenging materiality and that to paint is an intrinsically intellectually demanding activity.</p>
<p>하지만 그 정도는 낮다. 오직 회화만이 주체와 같은 힘을 지적하는 많은 역사적 주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Leon Battista Alberti의 Della pittura(1453)와 같이 현대에 생산된 회화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논문은 이미 더 큰 계급의 공예가로부터의 해방을 앞당기기 위해 화가의 명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알베르티는 조각가보다 화가에 대한 선호도가 조각가보다 화가가 더 어려운 일을 했다는 견해에 근거한 것”이라며 “그림은 도전적인 물질성을 갖고 있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지적으로 요구되는 활동임을 암시한다.</p>
<p>Once painting was declared to be intellectually challenging, it was only a matter of time before it would be claimed to have the intellectual powers of a subject. Hegel defined painting as a mode of artistic representation into which the "principle of finite and inherently infinite subjectivity" had forced its way.” Everything that is fundamentally part of a subject accordingly urges towards painting's surface. Subjectivity, however, is here not that of the artist but a universal faculty--"the principle of our own being and life"' According to Hegel, we see in the artifacts of painting what is "at work and operative within ourselves." And it is precisely because we believe we recognize in it a familiar potential that we at once feel "at home" in it. In other words, painting, in Hegel's view, moves us also because it stages principles that strike us as familiar and that constitute us. 'The decisive point of this argument is that Hegel aligns painting with the subject by ascribing a capacity for it—the capacity of subjectivity- which is, properly speaking, the exclusive privilege of subjects. Only subjects possess the ability to evolve an independent mental life. By according a subject-like power to painting, Hegel laid the ground for what I would describe as the central trope around painting in the twentieth century- namely, the assumption that there is thought in painting, that painting itself is able to think.</p>
<p>회화가 지적으로 도전적이라고 선언되면, 그것이 주체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헤겔은 회화를 "유한하고 본질적으로 무한한 주관성의 원리"가 강제한 예술적 재현의 한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주체의 일부인 모든 것은 회화의 표면을 향하여 촉구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체성은 예술가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능력, --"우리 자신의 존재와 삶의 원리"' 헤겔에 따르면, 우리는 회화의 인공물에서 "자신 안에서 작동하고 작동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안에서 "편안한" 느낌을 받는 친숙한 잠재력을 인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헤겔의 관점에서 회화는 우리를 친숙하게 만들고 우리를 구성하는 원칙들을 무대화하기 때문에 우리를 움직인다. '이 주장의 결정적 요점은 헤겔이 회화에 대한 능력, 즉 주체성의 능력, 즉 적절하게 말해서 주체의 배타적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회화를 주체와 일치시킨다는 것이다. 주체만이 독립적인 정신생활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헤겔은 회화에 대한 주체적 힘에 따라 내가 20세기 회화를 둘러싼 중심 비유, 즉 회화에 사유가 있고 회화 자체가 사유할 수 있다는 가정의 토대를 마련했다.</p>
<p><strong>18</strong> Leon Battista Alberti, On Painting, trans, John R. Spencer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66), 06.</p>
<p><strong>19</strong> G. W. R. Hegel, "The Romantic Arts? in Aestheties: Lectures on Ane Art, vol. 2, trane. T.M. Knox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797.</p>
<p><strong>20</strong> Ibid,</p>
<p><strong>21</strong> Ibid.</p>
<p><br></p>
<p>French painting theorists like Louis Marin or Hubert Damisch in particular have put forward this argument -that painting is a sort of discourse producer that arrives at its own insights. Once it is declared to be able to think it becomes subject-like.</p>
<p>특히 루이 마린(Louis Marin)이나 위베르 다미쉬(Hubert Damisch)와 같은 프랑스 회화 이론가들은 회화가 일종의 담론 생산자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것이 사고할 수 있다고 선언되면 그것은 주체와 같이 된다.<br></p>
<p><strong>VI Painting as a Highly Valuable Quasi-Person</strong></p>
<p>높은 가치의 유사-인물로서의 회화<br></p>
<p>But how does painting's capacity to evoke the sense of a subject-like force--its power to suggest that it actually operates like a person--relate to the value that is attributed to it?<strong>22</strong></p>
<p>그러나 주체와 같은 힘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의 능력, 즉 그것이 실제로 사람처럼 작동한다고 암시하는 능력은 그것에 귀속되는 가치와 어떤 관련이 있나?<br></p>
<p>For an artwork to be considered valuable, it first of all has to be attributable to an author--one could say that it thereby gets loaded with intentionality. This process gets intensified in the case of the indexical signs of paintings. Here, someone has left her traces (even if mechanically produced, this suggestion of a handwriting persists) and this enhances the impression of an intentional artwork, of an artwork that itself has agency. While all artworks have to function as an index of the one who brought them into existence in order for value to be attributed to them, painting seems to go further by suggesting that it is a quasi-person. Or to put this slightly differently: painting is particularly well equipped to satisfy the longing for substance in value. It indeed seems to demonstrate how value is founded in something concrete- the living labor of the artist.</p>
<p>예술 작품이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우선 작가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그렇게 되면 의도성이 짙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회화의 지표적 기호의 경우 더욱 심화된다. 여기에 누군가가 그녀의 흔적을 남겼고(기계적으로 만들어졌더라도 이러한 필체의 암시는 지속됨) 의도적인 예술 작품, 그 자체로 주체가 있는 작품의 인상을 강화한다. 모든 작품은 작품을 존재하게 한 사람에 대한 지표로 기능해야 가치가 부여되지만, 회화는 그것을 유사-인물이라고 암시함으로써 더 나아가는 것 같다. 또는 이것을 약간 다르게 표현하면, 회화는 특히 가치있는 실체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잘 갖추어져 있다. 그것은 예술가의 살아있는 노동이라는 구체적인 것에서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p>
<p><strong>22</strong> 1'm not distinguishing between symbolic and economic value here on purpose. I am referring to value in the sense of the place where social relevance is attributed to an artwork. All the claims that have been made for painting constitute its symbolic value. While symbolic value does not automatically get translated into economic value, it is never the precondition for economic value to occur.<br></p>
<p>여기서 일부러 상징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작품이 사회적 관련성을 부여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회화에 대한 모든 주장은 그 상징적 가치를 구성한다. 상징적 가치가 자동적으로 경제적 가치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경제적 가치가 발생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결코 아니다.</p>
<p>Let's recall how Karl Marx conceptualized value. While it is certainly true that his reflections on value were bound to the commodity and that he did not consider artworks commodities of a special kind, his notion of value has two undeniable advantages: it does not confound value and price, and therefore it prevents us from equating the value of an artwork with its market value.23 Even more importantly, Marx insisted on the relational, metonymic quality of value, thereby reminding us that value has no substance and is always elsewhere.<br></p>
<p>칼 마르크스가 어떻게 가치를 개념화 했는지 떠올려보자. 가치에 대한 그의 성찰이 상품에 한정되어 있고, 그가 예술품을 특별한 종류의 상품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의 가치 개념은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이점이 있다. 그것은 가치와 가격을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예술 작품의 가치를 시장 가치와 동일시하지 못하게 한다. 23 더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관계형의 환유적 가치를 주장함으로써 가치는 실체가 없고 항상 다른 곳에 있음을 상기시킨다.</p>
<p></p>
<p>Indeed, Marx on the one hand emphasized that no commodity is valuable in itself, that value is a "purely social" phenomenon.? This is also true for artworks: No artwork is valuable per se-its value is the result of an ongoing and never-ending social negotiation. If the symbolic value of Damien Hirst's work, for instance, is considered questionable because of his general strategic attitude towards the market, then his overall project will start to lack credibility and its price will eventually fall. But the worth of his practice is never fixed and is always open for reconsideration.</p>
<p>실제로, 마르크스는 한편으로 어떤 상품도 그 자체로 가치가 없으며 그 가치는 "순수한 사회적"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예술 작품에도 해당된다. 예술 작품 자체는 가치가 없다. 그 가치는 지속적이고 끝없는 사회적 협상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의 상징적 가치가 시장에 대한 일반적인 전략적 태도 때문에 의심스럽다면, 그의 전반적인 프로젝트는 신뢰성이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고, 가격은 결국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천의 가치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항상 재고할 여지가 있다.</p>
<p>On other hand, Marx pointed to how value represents “the diture of human labor in general.”25 This would mean that value eclipses concrete labor and turns it into its opposite-abstract human labor,."26 Now, painting seems to be one of the last places where the desire for a concrete foundation of value <em>seemingly</em> gets fulfilled. <u>Not only does it generate the illusionary impression that it is possible to grasp a fiber of the lived labor that was mobilized for it, but it moreover promises the existence of an imaginary place where labor actually remains private and concrete, detectable in the concrete materiality of its surface and the gestures that it displays</u>. The process of labor is not hidden but seemingly exposed, as if the lived labor of its author was something we could hold onto, as if it had not been transformed into "objectified labor" (vergegenständlichte Arbeit, Marx) during the process of exchange. Painting's capacity to appear particulary saturated with the lifetime of its author makes it the ideal candidate for value production.<br></p>
<p>반면에, 마르크스는 가치가 어떻게 "인간 노동의 일반의 전환"을 나타내는지를 지적했다. 25 이것은 가치가 구체적인 노동을 가리고 그것을 그와 반대되는 추상적인 인간 노동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26 이제 그회화는 가치의 구체적인 기초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는 최후의 장소 중 하나인 것 같다. 그것은 그것을 위해 동원된 살아있는 노동의 근성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적인 인상을 줄 뿐만아니라, 노동이 사적이고 구체적으로 남아있는 상상의 장소의 존재를 약속하며, 이는 표면의 구체적인 물질성과 그것이 나타내는 제스처에서 감지할 수 있다. 노동의 과정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마치 작가의 산 노동이 교환 과정에서 "객관화된 노동"(vergegenständlichte Arbeit, Marx)으로 변형되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붙잡을 수 있다. 특히 작가의 일생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회화의 능력은 가치 생산을 위한 이상적인 후보가 된다.</p>
<p><strong>23</strong> Pierre Bourdieu's notion of "symbolic value" allows us to theorize this non-equation, There can be symbolic value without market value.</p>
<p>피에르 부르디외의 "상징적 가치"개념은 우리가이 방정식을 이론화할 수 있게 해준다. 시장 가치가 없는 상징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p>
<p><strong>24</strong> “Turn and examine a single commodity, by itself, as we will, yet insofar as it remains an object of value, it seems impossible to grasp it. If, however we bear in mind that the value of commodities has a purely social reality, and that they acquire this reality only insofar as they are expressions or embodiments of one identical social substance, viz., human labour, it follows as a matter of course, that value can only manifest itself in the social relation of commodity to commodity," Karl Marx,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1, Part 1:'The Process of Capitalist Production, ed, Friedrich Engels, trans, Ernest Untermann (New York: Cosimo, 2007), 55.</p>
<p>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의 상품을 돌려보고 검토해 보지만, 그것이 가치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상품의 가치가 순전히 사회적 현실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이 하나의 동일한 사회적 실체, 즉 인간 노동의 표현이나 구체화인 한에서만이 현실을 획득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그 가치는 상품과 상품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p>
<p><strong>25</strong> But the value of a commodity represents human labour in the abstract, the expenditure of human labour in general.," Ibid., 51.</p>
<p>그러나 상품의 가치는 추상적으로 인간 노동, 일반적으로 인간 노동의 지출을 나타낸다.</p>
<p><strong>26</strong> Hence, the second peculiarity of the equivalent form is, that concrete labour becomes the form under which its opposite, abstract human labour, manifests itself" Ibid., 67,</p>
<p>따라서 동등한 형태의 두 번째 특성은 구체적인 노동이 그 반대의 추상적인 인간 노동이 나타나는 형태가된다는 것이다.<br></p>
<p>It is important to note that this search for value within lived labor gets even more pronounced in the current context of ongoing devalorization. One of the effects of the 2008 financial crisis Is that more and more desperate searches for value take place. The belief in the "personality" of the artwork and painting in particular is of course not a solution to the crisis, it is rather a way of both delaying and extending it.</p>
<p>살아있는 노동 내에서 가치에 대한 이러한 탐색은 평가 절하가 진행 중인 현재 맥락에서 훨씬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영향 중 하나는 가치에 대한 절박한 탐색이 점점 더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작품과 회화의 '성격'에 대한 믿음은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를 늦추고 확장하는 방식이다.</p>
<p><u>Let me conclude by saying that the topos of painting as a quasi-person has historically turned up in many different guises-starting from painters themselves, who have either seriously (like Francis Bacon or Charline von Heyl) or ironically (Albert Oehlen) referred to the idea that painting tells them what to do,? </u>The belief in the self-activity of painting is one of its central myths, a myth that is of course closely interwoven with the experience of production. I have mentioned already how several French art historians like Marin or Damisch have made a slightly different claim for a metapictorial “thinking* of paintings, demonstrating how it is able to produce its own discourse,28 While I wouldn't deny the possibility that a painting can occasionally deliver its own interpretation, I find it nevertheless important to realize that by claiming agency for painting (or for artworks in general), by treating them as quasi-persons, as I have aimed to show here that we tend to do, we become somewhat implicated in the process of value attribution, a process that has in any case already been fired up by our propositions regarding the nature of the artwork.</p>
<p></p>
<p>유사-인물로서의 회화적 위상은 역사적으로 화가들--프란시스 베이컨이나 샬린 폰 헤일처럼, 또는 아이러니하게도 알버트 오흘렌 처럼 그림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하는지 말해준다고 말한 화가들--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회화의 자기 활동에 대한 믿음은 회화의 중심 신화 중 하나이며, 이는 물론 생산 경험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신화다. 나는 Marin이나 Damisch와 같은 몇몇 프랑스 미술사가들이 어떻게 회화에 대한 은유적 “사고*”에 대해 약간 다른 주장을 했는지,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언급했다. 회화는 때때로 그 자체의 해석을 전달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우리가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회화(또는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에 대한)에 대한 대리인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을 유사-인물로 취급함으로써, 우리는 가치 귀속 과정에 다소 연루되어 있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예술 작품의 본질에 관한 우리의 제안에 의해 이미 촉발된 과정이다.</p>
<p><strong>27</strong> Francis Bacon: "I find that if I am on my own I can allow the paint to dictate to me." David Sylvester, Interviews with Francis Bacon (London: Thames & Hudson, 1988), 194. Charline von Heyl: "For me, what makes a painting is a mixture of authority and freedom, where it really just wants to be itself, where there is no justification, or explanation, or anything like that. Where it's just what it is for whatever reason." Claire Barliant and Christopher Turner, "Painting Paradox," Modern Painter (Summer 2009): 45. Albert Oehlen: "When I step into the room, I face them- which is extremely unpleasant. Each one shoots me a dirty look, as if to say, you idiot, you loser, you'll never make it." Albert Oehlen, interview by Eva Karcher, Süddeutsche Zeitung, October 9-10, 2010; trans. my own. In Corinna Bela’s documentary Gerard Richter Painting (2011), Richter jokingly says that his paintings do want they want.</p>
<p>프란시스 베이컨 : "만약 내가 혼자라면 페인트가 나에게 지시하도록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David Sylvester), Francis Bacon과의 인터뷰(London: Thames & Hudson, 1988), 194.</p>
<p>Charline von Heyl: "나에게 있어 그림을 만드는 것은 권위와 자유가 혼합된 것입니다. 어떤 정당화도, 설명도, 그런 것도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냥 있는 그대로입니다." Claire Barliant와 Christopher Turner, "Painting Paradox," Modern Painter(2009년 여름): 45.</p>
<p>Albert Oehlen: "내가 방에 들어갈 때, 나는 그것들을 마주한다. 그것은 매우 불쾌하다. 말하자면, 이 바보야, 이 패자야, 넌 절대 해내지 못할 거야." Albert Oehlen, Eva Karcher의 인터뷰, Süddeutsche Zeitung, 2010년 10월 9-10일; Corinna Bela의 다큐멘터리 Gerard Richter Painting(2011)에서 Richter는 농담으로 그의 그림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합니다.</p>
<p><strong>28</strong> See Louis Marin on Nicolas Poussin's The Arcadian Shepards: "The painting in the Louvre is a representation of the process of narrative representation associated with history." Louis Marin, To Destroy Painting, trans. Mette Hjort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1995), 26.</p>
<p>"루브르 박물관의 그림은 역사와 관련된 내러티브 표현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p>
<h3>
<br>(은비)</h3>
<p></p>
<p><strong>Questions for Isabelle Graw</strong></p>
<p>Peter Geimer</p>
<p>Isabelle Graw를 위한 질문들</p>
<p>피터 가이머<br></p>
<p>What I find interesting about your thesis is that you do not work with the term "indexicality" in its widely understood sense, but, instead, you mobilize it to mean the exact opposite, In the theory of photography, index, trace, and reprint count as modes by which an object registers itself physically. These do not necessarily require the presence of an author, and it is precisely through this quality that they open up an empty space of subjectivity and intentionality (somewhat like <strong>1</strong> André Bazin’s statements about photography being the first of the arts to derive an advantage from man's absence), ' Your understanding of indexicality- transferred to painting:-implies just the opposite; the promise of value being awarded by the visible or imagined presence of an author. You use the definition of painting as a "form of production of signs that is experienced as highly personalized" in place of the modernist and substantialist concept, and suggest this as an alternative trait of painting.</p>
<p>제가 당신의 논문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보편적 의미에서 "지표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 이론에서, 지표index, 흔적trace, 그리고 재인화reprint가 물체가 물리적으로 자신을 등록하는 모드로써 사용되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반드시 작가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정확히 이러한 자질을 통해 주관성과 의도성의 빈 공간을 엽니다(사진술이 인간의 부재에서 이점을 도출하는 최초의 예술이라는 앙드레 바진André Bazin의 진술과 다소 비슷합니다.), 당신의 지표성에 대한 이해는 - 회화에서 비롯된 - 정반대를 의미합니다; 작가라는 가시적이고 상상적 존재에 의해 부여되는 가치의 약속. 당신은 모더니즘과 실존주의 개념 대신 "고도로 개인화된 흔적(signs)(=행위자를 특정할 수 있는)의 생산 형태"로서 회화의 정의를 사용하고, 이것을 회화의 대안적 특성으로 제시합니다.</p>
<p></p>
<p>Here, I begin my two questions: Firstly, in this transfer, what happened to the condition, central to the Peircean definition, of physical contact between sign and signified? If mechanical means, printing, and the involvement of third parties have been employed in painting production for quite Some time now (as in your examples of Andy Warhol and Wade Guyton), then Peirce's central motif of direct physical contact has simply been canceled. Peirce also understood indexicality as more than mere construct or pure attribution, convention, or sug gestion, but instead as a real existent physical connection (in his example, something like that between the path of the sun and the analog shadow cast on the sundial, or between the wind's direction and the analog movement of the weather vane). What exactly do you gain in this argument by taking on Peirce's concept of indexicality, though in doing so varying one of his central conditions?</p>
<p>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이 이전에 Peirce 정의의 핵심인 기호와 기호의 의미의 물리적 접촉 조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기계적 수단, 인쇄 및 제 3자의 개입이 그림 제작에 꽤 오랫동안 사용돼 왔다면,(앤디 워홀과 웨이드 가이튼의 예시와 같이) Peirce의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라는 핵심 모티브는 단순하게 파기됩니다. Peirce는 또한 지표성을 실존하는 물리적 연결(예로, 태양의 경로와 해시계에 드리워진 아날로그 그림자 사이의 연결, 또는 바람의 방향과 풍향계의 아날로그 움직임 사이)으로 이해하는 대신에, 단순한 구성 또는 순수한 귀속, 관습 또는 암시 이상으로 이해했습니다. 당신은 Peirce의 핵심 조건 중 하나를 변화시키면서 지표성의 개념을 받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에서 정확히 무엇을 얻을 수 있나요?</p>
<p><br><strong>1</strong> André Bazin, "The Ontology of the Photographic Image," Film Quarterly 13, no. 4 (Summer 1960): 4-9</p>
<p></p>
<p>I also ask myself whether indexicality in your understanding is in fact specific to the contemporary discourse on painting. Why wouldn't this also be valid for a film or a video, where the camera work or editing can count as visible marks of the producer? (And, as Rosalind E. Krauss showed so well in her essay <strong>2</strong> *Photography's Discursive Spaces: Landscape/View," there have been many art historians who were anxious to establish a conceptualization of authorship and personal style, which is rooted in painting, within the medium of photography as well.) 2 The will to trace subjectivity in art seems to me to be effective in a medium-encompassing way, and not specific to painting.</p>
<p>나는 또한 당신의 이해한 지표성이 사실 회화에 대한 현대 담론에만 국한된 것인지 자문합니다. 카메라 작업이나 편집이 제작자의 가시적 표시로 간주될 수 있는 영화나 비디오에 지표성이 유효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로잘린드 E. 크라우스가 에세이 <strong>2</strong> *Photography's Discursive Spaces: Landscape/View에서 너무나 잘 보여주었듯이, 그림에 기반을 둔 작가성과 개인 양식의 개념화를 사진이라는 매체 내에서 확립하고자 애쓰는 미술사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술에서 주체성을 밝혀내려는 의지가 회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매체를 아우르는 효과적인 방식인 것 같습니다.</p>
<p><br>Secondly, can painting's function of reifying an artist's efforts-as shown in the exhibitions you mentioned-in fact serve to comprehensively explain the lasting painting boom? “Buying artworks indeed comes close to buying people"-however, most of the players do not approach painting from the perspective of potential buyers, but as gallery and museum visitors, curators, critics, or art historians. Would you say that their experiences with art-and even our conversation here-are also effects of economic structures? (Wouldn't that, in turn, be a quite determinist point of view, similar to the essentialist view of the media-specificity of art?)</p>
<p>둘째, 당신이 언급한 전시에서 보여주듯이 예술가의 노력을 구체화하는(가시화하는) 회화의 기능이 지속되는 회화 붐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나요? "예술품을 사는 것은 실제로 사람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그러나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잠재적인 구매자의 관점에서 그림에 접근하지 않고, 갤러리 및 박물관 방문객, 큐레이터, 비평가 또는 미술사학자로서 접근한다. 예술에 대한 그들의 경험-그리고 심지어 여기서의 우리의 대화도- 경제 구조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결국 예술의 미디어 특수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관점과 유사한 상당히 결정론적인 관점이 아닐까요?)</p>
<p><br><strong>2 </strong>Rosalind E. Krauss, "Photography's Discursive Spaces: Landscape/View," Art Journal 42, no. 4 (Winter 1982): 311-19</p>
<p><br></p>
<p><strong>Response to Peter Geimer</strong></p>
<p>Isabelle Graw</p>
<p>Peter Geimer를 위한 답변들</p>
<p>Isabelle Graw</p>
<p>It is true that at first glance it may be surprising that I make a claim for Peirce's definition of the index, and this even in light of those forms of painting based on mechanical processes like silk screen-and thereby contradict his central point about physical connection. Although, the mechanical process need not necessarily exclude a moment of physical contact, as seen with Warhol, who cultivated mistakes in his silk screens, or made improvements, or painted over the surface after the fact. All the same, I should likely have stressed the point that I am not adopting the Peircean model one-to-one, but modifying it. Whereas Peirce places the accent on the factual, physical connectedness of the index to its object, I highlight the index’s faculty for evoking this physical connection. In other words, photography-basically the recording of lighting conditions via a chemical process-evokes, or even better, suggests that it is the trace or the reprint of a real object. It is not this print, but much more--it suggests the presence of such a physical connection.<br></p>
<p>언뜻 보기에 내가 Peirce의 지표에 대한 정의를 주장하는 것에 놀랄 수 있고, 실크 스크린과 같은 기계를 사용하는 과정을 기반으로 한 회화의 형태에 비추어 볼 때도 물리적 연결에 대한 그의 핵심 요점과 모순될 수 있습니다. 비록 기계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신체 접촉의 순간을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워홀은 실크 스크린을 사용할 때 실수를 만들거나, 개선하거나, 그 이후에 표면에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Peirce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한다는 점을 강조했어야 했습니다. Peirce가 해당 대상에 대한 지표의 사실적, 물리적 연결성에 강조점을 둔 반면, 나는 이러한 물리적 연결을 불러일으키는 지표의 기능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사진술은 기본적으로 화학적 과정을 통해 빛의 상태를 기록하는 것으로, 실제 물체의 흔적이나 재인쇄임을 암시합니다. 이 프린트가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이 그러한 물리적 연결의 존재를 암시합니다.</p>
<p></p>
<p>I attribute a comparable potential for suggestion to the indexical signs in painting, except that here, a physical connection with the artist-subject as its author is evoked. I also consider this valid for every painterly practice that undermines the authority of the author by different means (for example, through non-subjective methods like the readymade, aleatoric procedures, or the delegation of the painterly process to someone else). Here, the avoidance of signature becomes the artist's signature. What do I gain, though, by adopting and modifying Peirce’s concept of indexicality? First of all, a more exact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such a bond between product and person, which is especially tight in painting. But unpainterly practices also lend themselves to being read as traces of the producer. You were right in referring to this with the editing of film. However in painting, this bond between product and person is especially unbreakable, as its signs refer to the producer consistently and not only selectively, like in film. The recourse to a semiotic approach presents the additional advantage of allowing for a media-unspecific understanding of painting, Because, as soon as I understand painting as a form of sign production, I can also pursue the presence of painterly signs in nonpainterly practices or consider expanded forms of painting that go beyond painting and have burst open the narrow confines of the canvas long ago. My model takes this despecification into account and also acknowledges the specific codes of painting.</p>
<p>나는 여기에서 작가로서의 예술가-주체와의 물리적 연결이 환기된다는 점을 제외하고, 회화의 지표성에 그와 비슷한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나는 또한 이 점이 다른 수단으로 작가의 권위를 훼손하는 모든 회화적 관행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예를 들어, 레디메이드, 우연에 의한 절차 또는 회화적 과정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는 것과 같은 비주관적 방법과 같이). 이 지점에서 서명을 회피하는 것은 예술가의 서명이 됩니다. 그렇지만 Peirce의 지표성 개념을 채택하고 수정함으로써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특히 회화에서 끈끈한, 결과물과 생산자 간의 유대의 본성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회화적 관행은 생산자의 흔적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당신이 이것을 필름 편집과 함께 언급한 것은 옳은 예시입니다. 그러나 회화에서 이 결과물과 생산자 사이의 유대는 특히나 깨지지 않는데, 그 기호가 영화에서처럼 선택적으로만 아니라 일관되게 생산자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기호학적 접근에 대한 의존은 회화에 대한 매체 비특정적 이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림을 기호 생산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순간, 비회화적 실천에서 회화적 기호의 존재를 추구하거나 회화를 넘어서 오래 전에 캔버스의 좁은 경계를 터트린 확장된 회화 형식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주장은 이러한 탈특이화을 고려할 뿐 아니라, 회화의 고유한 암호를 인정합니다.</p>
<p>Moreover, the focus on its specific indexicality allows me to better understand the attraction of a painterly practice that deals with images interceded by photographic media, like the early work of Gerard Richter. I believe that the reason for the lasting fascination with this painting form, which numerous artists have taken on, lies in its coordination of the indexicalities of two media: painting and photography.</p>
<p>게다가 그 특정한 지표성에 초점을 맞추면, Gerard Richter의 초기 작업과 같이 사진 매체에 의해 중재된 이미지를 다루는 회화적 실천의 매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용한 이 회화 형식에 계속해서 매료되는 까닭이 회화와 사진이라는 두 매체의 지표성의 조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p>
<p>As paintings of photographs, these images evoke the indexicality characteristic of photography: a reference to life. They are loaded with a sense of the real (Lebenswirklichkeit) as photography, so to speak. However, this is accompanied by an explicit painterly act through Richter's often-invoked blur technique, which not only abstracts the motif, but even further incorporates the painter's person, and this even despite the mechanical look and feel of this painterly blurring. In this way, the photographic element provides the image with a reference to life, which, nonetheless, will be molded by the painter's signature at the end. With Richter, you get both: the reference to reality and the suggestion of the presence of the painter.</p>
<p>사진의 회화로서 이 이미지는 사진의 지표성, 즉 삶에 대한 감각을 환기합니다. 말하자면 사진으로서의 실재감 (Lebenswirklichkeit)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종종 발동되는 리히터의 블러 기법을 통해 노골적인 화가적 행위를 동반하는데, 이는 이 회화적인 흐림의 부자연스러운 양상과 느낌에도 불구하고 모티프를 추상화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화가 자신을 더욱 통합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진적 요소는 이미지에 현실감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화가의 서명에 의해 완성됩니다. 리히터처럼 하면, 현실과 화가의 존재에 대한 암시 둘 다 얻을 수 있습니다.</p>
<p>Now, it is certainly true that not only painting but art in general is marked by the desire for traces of subjectivity. All artworks can be described as "indexes of agency" (Alfred Gell), though only in painting are aesthetics and subjectivity strongly interconnected. In this context, one need only recall Hegel’s "principle of finite and inherently infinite subjectivity," which would be groundbreaking for painting and allow us to feel more at home and somewhat familiar there (einheimischer). Painting's orientation towards subjectivity--subjectivity in the sense of a general capacity-leads to a problematic, anthropomorphic projection. Despite this, it is still important to maintain that it is painting (and not sculpture) that Hegel used as an example here; that it was painting, after all, which provided him with an occasion and reason for such projection, In my opinion, the unique dynamic developed by paint on a surface the understanding that, here, we are also dealing with a model of subjectivity in the sense of an independent, mental life.<br>이제 회화뿐만 아니라 미술 전반에 걸쳐서 주관성의 흔적에 대한 욕구가 두드러지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모든 작품은 "행위의 지표"(Alfred Gell)로 설명될 수 있지만, 회화에서만 미학과 주관성이 강하게 상호 연결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헤겔의 "유한하고 본질적으로 무한한 주체성의 원리"를 떠올리기만 하면 되는데, 이는 회화에 획기적인 것이 되고 우리가 집에 있는 듯 편안하고 친숙하게 느끼게 합니다(einheimischer). 주관성에 대한 회화의 지향성(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주관성)은 문제적이고 의인화된 투영으로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헤겔이 예시로 든 것이 (조각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합니다; 결국 그에게 그러한 추측의 기회와 이유를 제공한 것은 회화였습니다. 또한 제 생각에는 표면의 페인트가 만드는 독특한 역동성은 여기에서 우리가 독립적이고 정신적인 삶의 의미에서 주관성 개념을 다루고 있다는 이해를 발전시켰습니다.</p>
<p> Coming to your last point—of course, not everyone approaches painting as a potential buyer. But, if we understand painting as a specific form of sign production, perhaps it has an especially intense way of misleading its receivers to read its products as synonyms of their producers? There are certainly other historical explanations for its rise to a "success medium” (Niklas Luhmann), which I have cited, like the mobility of the work on canvas or the comparably low production costs, for example. Painting seems to lend itself especially well to being fetishized and effectively possessed. This also explains its lasting attraction from the viewpoint of artists.</p>
<p>마지막 요점에 도달하면 물론 모든 사람이 잠재적 구매자로 그림에 접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화를 기호 생산의 특정 형태로 이해한다면, 아마 수용자들로 하여금 창작자의 유의어로서 창작물을 읽도록 오해하게 하는 강력한 방법이지 않을까요? 회화의 “성공 매체”(Niklas Luhmann)로써의 부상에 대한 다른 역사적 서술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캔버스 작업의 이동성 또는 비교적 낮은 생산 비용과 같이 제가 인용한 바 있습니다. 회화는 자기 자신을 특히나 숭배하고 사실상 홀린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술가의 관점에서 계속해서 회화가 매력적인 이유를 설명합니다.</p>
<p> We have both thought about painting today, no doubt, as a consequence of the most recent economic and symbolic painting boom. In fact, painting started to be considered (seemingly) unproblematic since the late 1990s at least. There is no longer any pressure for justification. You could say that this situation was (involuntarily) prepared in the early 1980s by artists like Albert Oehlen or Martin Kippenberger. At that time, it was absolutely necessary to attack painting, even by means of its own tools, in order to grasp and drain the medium as a questionable belief system. Today, many artists consider this "painting against painting* that followed modernism's belief in painting's essence to be finished and resolved. Instead, in many exhibitions and in the statements of young painters, the mythical belief in Painting is revitalized, also in the sense of a self-acting entity.</p>
<p>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최근의 경제적이고 상징적인 회화 붐의 결과로써 오늘날의 회화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실, 회화는 적어도 1990년대 후반부터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타당성에 대한 압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 초에 알베르트 올렌이나 마틴 키펜버거 같은 예술가들에 의해 (자신들조차 모르게) 만들어져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의심스러운 믿음 체계로써 매체를 파악하고 빼내기 위하여 심지어 회화 자체의 도구일지라도 회화에 대한 공격은 불가피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모더니즘의 신념을 따랐던 이 *'반회화'가 종결되고 해결된 것으로 여깁니다. 대신 많은 전시회와 젊은 화가들의 진술에서, 스스로 행동하는 독립체라는 감각에서 회화에 대한 신화적 믿음이 다시 활성화됩니다.</p>
<p> </p>
<p>I have of course contributed to this rehabilitation of painting in my own work, when for instance relating Kippenberger’s paintings to institutional critique or when interpreting his seemingly expressive gestures as a form of conceptual expression. Instead of not having any more problems with painting, I want to keep discussing it as a "constellation of problems" (Problem-zusammenhang, Theodor W. Adorno) in my examination of the medium's specific indexicality, and, consequently, as something that is- like other art forms-problematic and markedly questionable per se. This is, not least of all, due to painting’s inherent personalization.</p>
<p>물론 저는 키펜버거의 그림을 제도적 비평과 연관짓거나 그의 작업에서 겉보기에 표현적인 제스처를 개념적 표현으로 해석할 때, 자기 자신의 소유물로서의 회화의 재활에 기여했습니다. 회화에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기 않는 대신, 저는 계속해서 매체 특정 지표성을 조사하며 ”문제의 별자리“(문제-맥락Problem-zusammenhang, Theodor W. Adorno)로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다른 예술 형식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문제가 있고 분명히 의심스러운 것으로서 회화에 대해 논의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회화에 내재하는 개인화 때문입니다.</p>
<p><strong>The Value of Painting: Notes on Unspecificity, Indexicality, and Highly Valuable Quasi-Person</strong></p>
<p>Isabelle Graw</p>
<p>그림의 가치 : 불특정성, 지표성, 고(부가)가치의 유사-인물에 관한 노트</p>
<h3>(희민)</h3>
<p></p>
<p><strong>1. Introduction</strong></p>
<p>In the following I will first try to develop a medium-unspecific notion of painting /that is nevertheless able to capture its residual distinctness even under the conditions /that led to its diffuse boundaries. These conditions will be addressed in view of their implications for painting. If painting has expanded and tends to be everywhere, as I will argue, then it seems to make little sense to delimit its realm. Yet this is what numerous painting exhibitions, keep doing: they treat painting as if it was a clearly circumscribed entity. However, painting has long since left its ancestral home — that is, the picture on the canvas — and is now omnipresent, as it were, and at work in other art forms as well.</p>
<p>We therefore cannot be sure what we are referring to when we talk "about painting."<strong>1 </strong>Do we mean painting in the sense of a medium, a technique, a genre, a procedure, or an institution? As a way out of these semantic quandaries, I will propose a less substantialist notion of painting: a form of production of signs that is experienced as highly personalized. This understanding of painting as highly personalized semiotic activity has several advantages—it is less restrictive, allowing us to see how painting is at work in other art forms as well, and it is able to capture what is specific about painting's codes, gestures, and materiality.<br></p>
<p><strong>1</strong> "About painting" was the title of the 2011 art fair/exhibition abc - art berlin contemporary.</p>
<p></p>
<p><strong>1.개요</strong></p>
<p>이 글에서 나는 먼저 장르적 경계가 확장된 동시대 매체 환경의 조건들 속에서도 여전히 특수성을 간직한 회화의 매체-불특정성에 대해 규명하려 한다. 종종 '포스트 미디엄 컨디션'(로잘린드 크라우스)이라 언급되는 이 조건들은 그것이 회화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다루어질 것이다. 만약 회화의 장이 확장되었고, 따라서 그림이 어디에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의 영역을 한정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깨진 거울" (Deichtorhallen Hamburg and Kunsthalle Wien, 1993)에서 “Painting on the Move" (Kunsthalle Basel, 2002)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회화 전시 또는 파이돈이 제작한 악명 높은 출판물들 (Painting Today, 2009)이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바이다. 그들은 회화가 명확하게 제한된 매체인 양 위협한다. 그러나 회화는 이미 오래 전에 조상들의 터전인 캔버스를 떠나 지금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다른 예술 형태로도 작동하고 있다.</p>
<p>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회화에 대해” 말할 때 무엇을 언급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strong>1</strong> 우리가 회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매체, 기술, 장르, 과정, 혹은 기관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의미론적 곤경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나는 그림에 대한 조금은 덜 실재론적인 개념을 제안할 것이다. 그것은 <strong>회화를 고도로 개인화된 것으로 경험되는 표지의 생산 형태로 이해하는 것</strong>이다. 회화를 고도로 개인화된 기호학적 활동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즉, 회화가 다른 예술 형태에서도 어떻게 작동하는지 볼 수 있도록 하고, 회화의 코드, 제스처 및 물질성이 갖는 특수성을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p>
<p><strong>1</strong> "About painting" 은 아트페어이자 전시인 2011년 abc-아트 베를린 컨템포러리의 제목이었다.</p>
<p><br>In addition to this, the focus on painting's indexicality enables us to grasp the particularly strong bond that we encounter between the person and the product. This bond has been of particular relevance for anthropology, which tends to repped artworks as equivalents of people.<strong>2 </strong>While this view underestimates the fact that the two groups function differently in many respects, I nevertheless find Alfred Gell's definition of artworks as "indexes of agency" very useful.<strong>3</strong> Painting takes this aspects of artworks—that they are perceived as social indexes—to the very extreme. In order to argue painting's particular ability to suggest social agency, I will investigate the highly personalized nature of this particular sign production and relate it to the way it obtains value.<br></p>
<p>There are many indications of painting's lasting popularity: we keeps fetching the highest prices on the art market and it survived the manifold historical attempts to declare it finished, dead, obsolete, etc, I will conclude by offering one possible explanation for its tenacity. Granted, there are other, more pragmatic reasons for its lasting popularity that I won't elaborate on here (such as the easy transport and circulation of pictures on canvas). Moreover paintings are usually based on comparatively low production costs, which also contributes to their attraction. But I am more interested here in the powerful suggestion that painting is able to produce as an art form: I will argue that it is particularly disposed to support the expectation—wiespread in the art world—that acquiring a work of art means getting a hold on the artist's labor capacity and therefore owning a slice of her life. Buying artworks indeed comes close to buying people—and this is especially true for painting.</p>
<p><strong>2</strong> Alfred Gell, Art and Agency: An Anthropological 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7.</p>
<p><strong>3 </strong>Ibid., 17.</p>
<p>여기에 더해, 회화의 지표성에 초점을 맞추면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유독 강한 유대감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유대감은 특히 예술작품을 사람과 동등한 것으로 만드는 인류학과 관련이 있다.<strong>2</strong> 이러한 견해는 두 그룹이 많은 면에서 다르게 기능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술작품을 "대리의 지표"로 정의한 알프레드 겔의 정의가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strong>3</strong> 회화는 예술작품의 이러한 측면들, 즉 그것들이 사회적 지표로 인식되는 것을 강하게 받아들인다. 회화가 <strong>사회적 대리물로 기능하는 </strong>특별한 능력에 대해 논하기 위해, 나는 이 특정한 표지 제작의 고도로 개인화된 성격을 조사하고 그것이 가치를 생산하는 방법과 연관시킬 것이다.</p>
<p>여기에 더해, 회화의 지표성에 초점을 맞추면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유독 강한 유대감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유대감은 예술작품을 사람과 동등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인류학과 특히 관련이 있다.<strong>2</strong> 이러한 견해는 두 그룹이 많은 면에서 다르게 기능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술작품을 "대리의 지표"로 정의한 알프레드 겔의 정의가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strong>3</strong> 회화는 예술작품의 이러한 측면들, 즉 그것들이 사회적 지표로 인식되는 것을 강하게 받아들인다. 회화가 <strong>사회적 대리물로 기능하는 </strong>특별한 능력에 대해 논하기 위해, 나는 이 특정한 표지 제작의 고도로 개인화된 성격을 조사하고 그것이 가치를 생산하는 방법과 연관시킬 것이다.</p>
<p>그림의 지속적인 인기는 여러 조짐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미술 시장에서 그림을 계속 최고의 가격으로 팔고 있고, 그림의 종말, 죽음, 쓸모없음 등을 선언하려는 다양한 역사적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나는 이 <strong>끈기/지속성</strong>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설명을 제시하며 글을 마무리 할 것이다. 물론 회화가 살아남은 데에는 내가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다른, 더실용적인 이유들이 있다(예를 들면, 캔버스의 쉬운 운반과 유통). 게다가, 그림은 보통 상대적으로 낮은 제작비를 기반으로 하는데, 이것 또한 그림의 매력을 더해준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그림이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려 한다. 특히, 작품을 얻는 것이 예술가의 노동력을 장악하고, 따라서 그녀(작가의) 삶의 한 부분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예술계에 널리 퍼져있는 기대를 회화가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strong>미술품을 사는 것은 정말로 사람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strong>. 그리고 이것은 특히 그림에 있어 진실이다.</p>
<p><strong>2</strong> Alfred Gell, Art and Agency: An Anthropological 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7.</p>
<p><strong>3 </strong>Ibid., 17.</p>
<p></p>
<p><strong>2. For an Expanded Notion of Painting</strong></p>
<p><br>I have already hinted at the problems of defining painting. When most artistic practices, not only painterly ones, have undergone massive differentiation and expansion, it becomes rather difficult to pin down painting. How do we determine an “unresolved category"?<strong>4</strong> I would like to suggest that we work with an expanded notion of painting that breaks with the modernist understanding of it as a clearly delineated practice characterized by given norms and conventions. Since the borders between the different art forms have become permeable, at least since the 1960s, we have found ourselves in a situation where different media relate to, refashion, and remodel each other. This process has been termed "re-mediatization,"<strong>5</strong> and occurs when the features that have been ascribed to one medium—for instance, flatness or representational strategies in painting—are addressed by another medium—for instance, large-scale photography.<strong>6</strong> And sure enough, artists from Jeff Wall to Wolfgang Tillmans have tirelessly demonstrated to us that photography can take up the representational and narrative strategies of painting; that it can aim at creating surfaces that suggest the materiality of abstract painting.</p>
<p>The crucial point remains here that the modernist idea of an art that is defined by the "essence of its medium' has clearly lost its relevance. Once the medium can no longer be delimited, then no qualities can be inherent to it. Its character, rather, depends on how the artist will proceed with it.</p>
<p><strong>4</strong> Quoted from the press release of the exhibition "Nikolas Gambaroff, Michael Krebber, R. H. Quaytman, Blake Rayne* at Bergen Kunsthall, November 5-December 22, 2010.</p>
<p><strong>5</strong> See Ilka Becker, " The Image as Revenant: Retroactivity and Remediation in the Works of T.J. Wilcox," trans. Michael Lattek,<em> Texte zur Kunst</em>, no. 79 (December 2009): 126-31.</p>
<p><strong>6</strong> Michael Fried has written a whole book about how the former themes that he detected in eighteenth-century painting—absorption, theatriciality—are now taken up by contemporary photographers. Michael Fried, "Introduction," in Why Photography Matters as Art as Never Before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8), 1-4.</p>
<p></p>
<p><strong>2. 확장된 회화의 개념을 위해</strong></p>
<p></p>
<p>나는 이미 그림을 정의하는 문제의 어려움에 대해 암시했다. 화가로서의 행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예술적 행위들이 엄청난 분화와 확장을 겪었을 때, 그림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오히려 어려워진다. 우리가 이 "확인되지 않은 범주"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strong>4</strong> 나는 우리가 주어진 규범과 관습으로 특징지어지는 명확한 관행으로서의 모더니즘적 이해를 깨는 확장된 회화의 개념을 가지고 일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늦어도 1960년대 이후부터 서로 다른 예술 형태 사이의 경계가 유연해지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미디어가 서로 관련되고, 재유행하고, 서로를 재구축하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은 "재매개화"라고 불리며,<strong>5</strong> 한 매체에 귀속된 특징들(예를 들어, 평면성 또는 회화에서의 재현적 전략)이 다른 매체에 의해 다루어질 때 발생한다(예를 들어, 대규모 사진처럼) <strong>6</strong> 그리고 당연하게도, 제프 월에서 볼프강 틸만스에 이르는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사진이 회화의 재현적, 서술적 전략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입증해 왔다. 달리 말해, 사진이 추상 회화에서의 물질성을 제시하는 표면을 만드는 것을 목표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p>
<p>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술을 "그 매체의 본질"에 의해 정의하는 모더니즘적 사고는 분명히 그 시의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일단 매체를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하면, 매체의 고유한 특성이란 있을 수 없다. 매체의 특성은 오히려 예술가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p>
<p><strong>4</strong> Bergen Kunsthall에서 2010년 11월 5일에서 12월 22일까지 열린 전시 "Nikolas Gambaroff, Michael Krebber, R. H. Quaytman, Blake Rayne"의 보도자료에서 인용함.</p>
<p><strong>5</strong> Ilka Becker, " The Image as Revenant: Retroactivity and Remediation in the Works of T.J. Wilcox,"를 참고할 것. 번역. Michael Lattek,<em> Texte zur Kunst</em>, no. 79 (December 2009): 126-31.</p>
<p><strong>6</strong> 마이클 프리드는 그가 18세기 그림에서 감지한 흡수와 연극성이라는 주제가 현대 사진 작가들에 의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한 단행본을 썼다. Michael Fried, "Introduction," in Why Photography Matters as Art as Never Before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8), 1-4.</p>
<p></p>
<p><strong>3. Good-Bye to Medium-Specificity?</strong></p>
<p></p>
<p>Clement Greenberg was the leading champion of the idea that modernist painting in particular is not only characterized by "essential norms and conventions" such as the flatness of its surface, but that each painting has to ideally criticize these limitations "from the inside."<strong>7</strong> It is interesting to note how the descriptive and the normative levels merged in his notion of the medium. Not only did he essentialize painting, ignoring the fact that it actually shares its supposedly essential condition—the flat surface—with writing, he moreover expected the artist to defend the imaginary purity of her medium by criticizing it from within.</p>
<p><br>Now, this privilege that Greenberg had accorded to the medium became historically untenable once painting lost its purity and expanded into life, as in the Combine paintings of Robert Rauschenberg. Greenberg's position became even more questionable when those Conceptual art practices emerged in the late 1960s that strongly relied on different technologies, such as film photography or diagrams. This was an art that was more generic than medium specific, as André Rottmann has rightly pointed out.<strong>8</strong> One might add to this that the rejection of the</p>
<p>privileged status of painting has a much longer history, and regularly occured in painterly practices as well. As an example of a painting that says good-bye to the tradition of “pure painting,” I would refer to Francis Picabia’s Nature Morte(1920).</p>
<p><strong>7</strong> Clement Greenberg, Modernist Painting," in Clement Greenberg: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4, <em>Molemim with a Vengeance</em>, 1957-1960, ed. John O'Bria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89, 85.</p>
<p><strong>8</strong> André Rottmann "Networks, Techniques, Institutions: Art History in Open Circuits, <em>Texte zur Kunst</em>, no. 81 (March 2011): 142- 44</p>
<p></p>
<p><strong>3. 매체 특정성과의 작별</strong></p>
<p></p>
<p>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특히 회화가 평면성과 같은 "필수적 규범과 관습"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모더니즘 사상 뿐만 아니라, 각 회화가 이러한 한계를 "내부로부터" 이상적으로 비판해야 한다는 사상의 선도적인 옹호자였다.<strong>7</strong> 매체에 대한 그의 관념이 서술적, 규범적 층위와 어떻게 합쳐지는지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는 그림을 본질화하고, 그것이 실제로 필연적인 상태, 즉 평평한 표면을 글쓰기와 공유한다는 사실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그것을 내부에서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매체에 대한 <strong>망상적</strong> 순수성을 옹호할 것이라고 기대했다.</p>
<p>이제 그린버그가 매체에 부여했던 이 특권은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Combine paintings에서처럼 그림이 순수성을 잃고 삶으로 확장되면서 역사적으로 수호될 수 없게 되었다. 그린버그의 입장은 1960년대 후반에 영화 사진이나 다이어그램과 같은 다른 기술에 강하게 의존하는 개념 미술이 등장했을 때 훨씬 더 의심스러워졌다. 앙드레 로트만이 올바르게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은 매체 특정적이기보다 더 일반적인 예술이었다.8 누군가는 여기에서 회화의 특권적 지위에 대한 거부감은 훨씬 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화가로서의 <strong>행위 차원</strong>에서도 정기적으로 일어 왔다고 첨언할 수 있다. ‘순수 회화'의 전통에 작별을 고하는 그림의 예로는 프란시스 피카비아의 Nature Morte(1920)를 들 수 있다.</p>
<p></p>
<p><strong>7</strong> Clement Greenberg, "Modernist Painting," in <em>Clement Greenberg: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em>, vol. 4, <em>Molemim with a Vengeance</em>, 1957-1960, ed. John O'Bria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89, 85.</p>
<p><strong>8</strong> André Rottmann "Networks, Techniques, Institutions: Art History in Open Circuits, <em>Texte zur Kunst</em>, no. 81 (March 2011): 142- 44</p>
<p></p>
<p>The painting contaminates the alleged purity of its medium by drawing on different formats: the readymade (in the form of the stuffed animal attached to the surface that "stubbornly clings to the domain of painting," as George Baker no adequately put it) and text (the written names of "great" male artists like Cézanne, Rembrandt, and Renoir, whose portrait we are meant to see and who turn out to be nothing but a dead animal, natures mortes).9 Cézanne, for one, whose work was always considered to be the epitome of pure painting, is declared to be as dead as the stuffed ape. The status of painting as a higher art form and the correlating belief in its purity and essence are doubly threatened here: not only by the incorporation of a ready made that enforces the external logic of the commodity and productive labor into the painting, but also by the textual elements, which equally threaten to bury painting's alleged essence.</p>
<p>Are we then obliged to deduce from this that there is nothing medium specific about painting anymore? I believe that we have to concede at this point that some artists, and painters in particular, do indeed encounter problems in their practice that they ascribe to the specificity of their respective medium. But it is one thing to acknowledge a certain degree of medium-specificity at this level of artistic production, and another to derive a highly questionable general norm of medium-specificity from it.</p>
<p></p>
<p><strong>9</strong> George Baker, "The Artwork Caught by the Tail: Dada Painting" in The Artwork Caught by the Tail: Francis Picabia and Dada in Paris (Cambridge, MA: MIT Press, 2007), 101.<br></p>
<p>이 그림은 (조지 베이커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박제 동물의 형태를 연상시키며 "그림의 영역에 완고하게 달라붙는”, ) 레디메이드와 (우리가 보게 될 세잔, 렘브란트, 르누아르와 같은 "위대한" 남성 예술가들-죽은 동물이자 네이처 모르테에 불과한-의 초상화 위에 적힌 이름들과 같은)<strong>9</strong> 텍스트라는 다른 형식으로 그려냄으로써 매체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 예를 들어, 언제나 순수 회화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세잔은 박제된 유인원처럼 죽었다고 선언된다. 여기서 상위 예술 형식로서의 회화의 지위와 그와 결부된 회화의 순수성과 본질에 대한 믿음은 상품이라는 외부 논리와 생산적인 노동을 그림에 강요하는 레디메이드(ready made)와의 통합뿐만 아니라—마찬가지로 그림의 본질을 묻어버릴 위험이 있는—텍스트 요소들에 의해서 이중으로 위협받고 있다.</p>
<p>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회화에 더 이상 매체적 특징이 없다는 것을 추론할 의무가 있는가? 나는 이 시점에서 일부 예술가들, 특히 화가들이 각자의 매체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실제적인 문제에 직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적 생산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매체 특이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로부터 매우 의심스러운 일반 규범을 도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p>
<p><strong>9</strong> George Baker, "The Artwork Caught by the Tail: Dada Painting" in The Artwork Caught by the Tail: Francis Picabia and Dada in Paris (Cambridge, MA: MIT Press, 2007), 101.<br></p>
<p><strong>4. Painting and Indexicality</strong><br></p>
<p>So, how to define painting once it has merged with other procedures—from the readymade and linguistic propositions to the insights of institutional critique? How to determine practice that renders impossible the rigorous distinction between what is intrinsic and what is extrinsic to it? I want to propose that we conceive of painting not as a medium, but as a production of signs that is experienced as highly personalized. By focusing on painting's specific indexicality, we will be able to grasp one of its main characteristics: it is able to suggest a strong bond between the product and the (absent) person of its maker. This is due to the way indexical signs actually operate: According to Charles S. Peirce, an index shows something about a thing because of its <em>physical connection</em> to it.<strong>10</strong> Since he mentioned photography as an example for this "class of signs," art historians tend to mainly treat photography as the indexical art form par excellence.<strong>11</strong> But I would argue that painting suggests such a physical connection even more strongly. Someone has left her marks.</p>
<p>Frank Stella's observation that painting is a sort of handwriting was actually quite to the point.<strong>12 </strong>Its signs are indexical insofar as they can be read as traces of the producing person. Now even if we opt for a deconstructionist approach, insisting how the trace equally addresses "the formal conditions of separation, division, and deferral,”<strong>13</strong> we are still dealing with the ghost of a presence. This is also true for those paintings that avoid hand-writing by using a technical device, as in Gerhard Richter's abstract paintings produced with a squeegee.</p>
<p></p>
<p><strong>10</strong> Charles S. Peirce, “What Is a Sign?”, in <em>The Essential Peirce: Selected Philosophical Writings</em> vol 2, 1893 -1913, ed. The Peirce Edition Project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8), 9.</p>
<p><strong>11</strong> See Rosalind E, Krauss, Notes on the Index: Seventies Art in America,” <em>October</em> 3 (Spring1977): 68-81.</p>
<p><strong>12</strong> Bruce Glaser, Questions to Stella and Judd,” in<em> Minimal Art: A Critical Anthology</em>, ed. Gregory Battcock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157.</p>
<p><strong>13</strong> Jacques Derrida, quoted in Rosalind B. Krauss, “Six," in<em> The Optical Unconscious</em> (Cambridge, MA: MIT Press, 1993), 260.</p>
<p></p>
<p>5. 페인팅과 지표성</p>
<p>그렇다면, 회화가 다른 절차와 병합되면, 즉 레디 메이드와 언어적 명제에서 제도적 비평의 통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내재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관행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나는 우리가 그림을 매체가 아니라 고도로 개인화된 표지의 생산으로 인식한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림의 특정 지표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strong>사물</strong>과 (부재하는) 제작자 사이의 강한 유대를 암시한다는 주요한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인덱스 부호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 때문이다. 찰스 S. Peirce에 따르면, 색인은 사물에 대한 무엇인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색인이 사물과 물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하다.<strong>10</strong> 그가 사진을 이 "부호의 종류"에 대한 예로 언급했기 때문에, 미술 역사가들은 사진을 탁월한 지표적 예술 형식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strong>11</strong> 그러나 나는 그림이 그러한 물리적 연관성을 훨씬 더 강하게 시사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누군가가 자신의 흔적(지표)을 남겼다.</p>
<p>그림은 필적의 일종이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관찰은 사실 꽤 요령 있었다.<strong>12</strong> 그 부호는 제작자의 흔적으로 읽을 수 있을 만큼 지표적이다. 이제 우리가 그 흔적이 어떻게 "분리, 분열, 연기의 형식적 조건"을 동등하게 다루는지 주장하는 해체주의적 접근을 선택하더라도 <strong>13</strong> 우리는 여전히 존재의 유령을 다루게 된다. 이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적인 그림에서처럼 기술적인 장치를 사용하여 필적을 피하는 그림에도 해당된다.</p>
<p></p>
<p><strong>10</strong> Charles S. Peirce, “What Is a Sign?”, in <em>The Essential Peirce: Selected Philosophical Writings</em> vol 2, 1893 -1913, ed. The Peirce Edition Project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8), 9.</p>
<p><strong>11</strong> See Rosalind E. Krauss, Notes on the Index: Seventies Art in America,” <em>October</em> 3 (Spring1977): 68-81.</p>
<p><strong>12</strong> Bruce Glaser, Questions to Stella and Judd,” in<em> Minimal Art: A Critical Anthology</em>, ed. Gregory Battcock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157.</p>
<p><strong>13</strong> Jacques Derrida, “Six," in<em> The Optical Unconscious</em> (Cambridge, MA: MIT Press, 1993), 260 에서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인용.</p>
<p></p>
<p>By moving the squeegee up and down the painting in a particular way, Richter inscribes his own body movement into the painting. In other words, attempts to eliminate the subjectivity of the artist into painting.<strong>14</strong> And the more negation there is of handwriting, the more this negation will be considered to be the handwriting of the artist.<strong>15 </strong><br></p>
<p>Yet linking indexicality to painting does not imply that we ignore the split that occurs between the artwork and the authentic self. What we encounter in painting is not so much the authentically revealed self of the painter, but rather signs that insinuate that this absent self is somewhat present in it. As a highly mediated idiom, painting provides a number of techniques, methods, and artifices that allow for the fabrication of the impression of the author's quasi-presence as an effect.</p>
<p>For this indexical effect to occur, the artist does not need to have literally set her hand on the picture, or to have brandished a brush, or to have thrown paint on it. A mechanically produced silkscreen by Andy Warhol, who often delegated his work to his assistants, or a printed black painting by Wade Guyton, is no less capable of conveying the sense of a latent presence of the artist—by virtue, for instance, of imperfections deliberately left uncorrected, selected combinations of colors, or subsequent improvements. Painting, then, would have to be understood as the art form that is particularly favorable to the belief—widespread in the visual arts more generally—that by approaching or purchasing a work of art, it is possible to get a more immediate access to what is assumed to be the person of the artist and her life.<br></p>
<p><strong>14</strong> See Isabelle Graw, " The Knowledge of Painting: Notes on Thinking Images, and the Person in the Product," trans. Gerrit Jackson, Texte zur Kunst, no. 82 (June 2011): 114-25.</p>
<p><strong>15</strong> "Noch [kann] die Wahl eines Mediums, das Handschriflichkeit ausdrücklich negiert, Ausdruck (oder 'Medium') eben der Handschrift eines Künstlers sein." Michael Luthy and Christoph Menke, "Einleitung," in <em>Subjekt und Medium in der Kunst der Moderne</em>, ed. Michael Lüthy and Christoph Menke (Zurich: diaphanes, 2005), 9.</p>
<p></p>
<p>리히터는 특정한 방식으로 스퀴지를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그림에 새겨넣는다. 이는 회화에서 작가의 주관성을 제거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필적에 대한 부정이 강할수록 이 부정은 화가의 필적으로 간주될 것이다.<strong>15</strong><br><br>그러나 지표성을 그림과 연결시킨다고 해서 예술작품과 진정한 자아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회화에서 마주치는 것은, 진정으로 드러난 화가의 자아라기 보다는 그의 부재한 자아가 어느 정도 그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호들이다. 고도로 매개된 관용구로서, 회화는 효과로서 작가의 유사 존재의 인상을 조작할 수 있는 많은 기술, 방법론, 그리고 기교를 제공한다.<br><br>이러한 지표적 효과가 일어나기 위해 작가는 말 그대로 그림에 손을 대거나 붓을 휘두르거나 물감을 던질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그의 작업을 조수에게 자주 위임했던 Andy Warhol의 기계적으로 제작된 실크스크린이나 Wade Guyton의 인쇄된 검은색 그림 속 의도적으로 수정되지 않은 결함들이나 선택된 색상의 조합 또는 그에 <strong>조형적 전개</strong>는 예술가의 잠재된 존재감을 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회화는 예술 작품에 접근하거나 구입함으로써 예술가와 그녀의 삶으로 추정되는 것에 더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시각 예술에서 일반화된 믿음에 유리한 예술 형태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p>
<p><strong>14</strong> Isabelle Graw의 " The Knowledge of Painting: Notes on Thinking Images, and the Person in the Product," trans. Gerrit Jackson, Texte zur Kunst, no. 82 (June 2011): 114-25 을 참고할 것.</p>
<p><strong>15</strong> "Noch [kann] die Wahl eines Mediums, das Handschriflichkeit ausdrücklich negiert, Ausdruck (oder 'Medium') eben der Handschrift eines Künstlers sein." Michael Luthy and Christoph Menke, "Einleitung," in <em>Subjekt und Medium in der Kunst der Moderne</em>, ed. Michael Lüthy and Christoph Menke (Zurich: diaphanes, 2005), 9.<br></p>
<h3>(나하)</h3>
<p></p>
<p><strong>V Painting as a Thinking Subject</strong></p>
<p>생각하는 주체로서의 회화<br></p>
<p>'There is one feature of the indexical sign that I have not yet mentioned: according to Peirce, the indexical sign is able to capture our attention because it is affected by the power of its object. *• Now, in the case of painting's indexicality, this object is a subject- the person of the artist. This is why painting can be potentially experienced as being intriguing in a way that only an intriguing person could be. You might object that sculpture is able to do exactly the same thing. Isn't sculpture marked by a similar kind of indexicality and it therefore also suggest that it is a quasi-person?<strong>17</strong></p>
<p>'내가 아직 언급하지 않은 지표 기호의 한 가지 특징이 있다. Peirce에 따르면 지표 기호는 대상의 힘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의 주의를 끌 수 있다. *• 이제 회화의 지표성(indexicality)의 경우 이 대상은 주체, 즉 작가의 인격이다. 이것이 바로 그림이 흥미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흥미로운 것으로 잠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이유다. 조각품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반대할 수도 있다. 조각품도 이와 유사한 지표성을 갖고 있어 유사-인물임을 시사하지 않는가?<br></p>
<p><strong>16</strong> An index is a thing which having been forcibly affected by its object, forcibly affects its interpretant and causes that interpretant to be forcibly affected by the object, and to affect, (Ch interpretant in turn; and which, further, so Far as if is a sig0, becomes a sign in this wah Charles S, Peirce, 1902, The Papers of Charles S. PelIce, R 509, Floughion Library, Harrard</p>
<p>인덱스(지표)는 대상에 의해 강제적으로 영향을 받아 해석자에게 강제로 영향을 미치고 해당 해석자가 대상에 의해 강제로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p>
<p><strong>17</strong> The term quasi-person evokes Bruno Latour's actor-network-theory and his understanding of things as "quasi-objects" or "actants." Latour famously proposed that objects are to be recognized as taking part in actions. They do not act as such- they have their role to play in the course of an action. While I find his call for considering objects decisive for an action interesting, I am less sure of his overall project that attacks critical sociology. By replacing the concept of "society" with a more progressive-sounding "collective" that includes nonliving objects as well, the different action potentials of subjects and objects are underestimated as much as the power relations and hierarchies between subjects are left out of sight. See Bruno Latour,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p>
<p>유사-인물이라는 용어는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이론과 사물을 "준 대상" 또는 "행위자"로 이해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Latour는 물체가 행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행동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있다. 나는 행동을 위해 결정적인 대상을 고려하라는 그의 요청이 흥미롭다고 생각하지만 비판적 사회학을 공격하는 그의 전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사회"라는 개념을 무생물도 포함하는 보다 진보적인 "집단"으로 대체함으로써 주체 간의 권력 관계와 위계가 보이지 않는 만큼 주체와 객체의 다른 활동 잠재력이 과소 평가된다.<br></p>
<p>Yes, it does, but to a lesser degree. Only painting has many historical arguments pointing to its subject-like power--arguments that I believe do reach into our present. The very first systematic treatise on painting produced in the modern era, for instance, Leon Battista Alberti's Della pittura (1453), already aimed to raise the reputation of painters in order to advance their emancipation from the larger class of craftsmen. Indicatively enough, Alberti based his preference for the painter over the sculptor on his view that the former worked with more difficult things,"'S thereby implying that painting possesses a challenging materiality and that to paint is an intrinsically intellectually demanding activity.</p>
<p>하지만 그 정도는 낮다. 오직 회화만이 주체와 같은 힘을 지적하는 많은 역사적 주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Leon Battista Alberti의 Della pittura(1453)와 같이 현대에 생산된 회화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논문은 이미 더 큰 계급의 공예가로부터의 해방을 앞당기기 위해 화가의 명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알베르티는 조각가보다 화가에 대한 선호도가 조각가보다 화가가 더 어려운 일을 했다는 견해에 근거한 것”이라며 “그림은 도전적인 물질성을 갖고 있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지적으로 요구되는 활동임을 암시한다.</p>
<p>Once painting was declared to be intellectually challenging, it was only a matter of time before it would be claimed to have the intellectual powers of a subject. Hegel defined painting as a mode of artistic representation into which the "principle of finite and inherently infinite subjectivity" had forced its way.” Everything that is fundamentally part of a subject accordingly urges towards painting's surface. Subjectivity, however, is here not that of the artist but a universal faculty--"the principle of our own being and life"' According to Hegel, we see in the artifacts of painting what is "at work and operative within ourselves." And it is precisely because we believe we recognize in it a familiar potential that we at once feel "at home" in it. In other words, painting, in Hegel's view, moves us also because it stages principles that strike us as familiar and that constitute us. 'The decisive point of this argument is that Hegel aligns painting with the subject by ascribing a capacity for it—the capacity of subjectivity- which is, properly speaking, the exclusive privilege of subjects. Only subjects possess the ability to evolve an independent mental life. By according a subject-like power to painting, Hegel laid the ground for what I would describe as the central trope around painting in the twentieth century- namely, the assumption that there is thought in painting, that painting itself is able to think.</p>
<p>회화가 지적으로 도전적이라고 선언되면, 그것이 주체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헤겔은 회화를 "유한하고 본질적으로 무한한 주관성의 원리"가 강제한 예술적 재현의 한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주체의 일부인 모든 것은 회화의 표면을 향하여 촉구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체성은 예술가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능력, --"우리 자신의 존재와 삶의 원리"' 헤겔에 따르면, 우리는 회화의 인공물에서 "자신 안에서 작동하고 작동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안에서 "편안한" 느낌을 받는 친숙한 잠재력을 인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헤겔의 관점에서 회화는 우리를 친숙하게 만들고 우리를 구성하는 원칙들을 무대화하기 때문에 우리를 움직인다. '이 주장의 결정적 요점은 헤겔이 회화에 대한 능력, 즉 주체성의 능력, 즉 적절하게 말해서 주체의 배타적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회화를 주체와 일치시킨다는 것이다. 주체만이 독립적인 정신생활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헤겔은 회화에 대한 주체적 힘에 따라 내가 20세기 회화를 둘러싼 중심 비유, 즉 회화에 사유가 있고 회화 자체가 사유할 수 있다는 가정의 토대를 마련했다.</p>
<p><strong>18</strong> Leon Battista Alberti, On Painting, trans, John R. Spencer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66), 06.</p>
<p><strong>19</strong> G. W. R. Hegel, "The Romantic Arts? in Aestheties: Lectures on Ane Art, vol. 2, trane. T.M. Knox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797.</p>
<p><strong>20</strong> Ibid,</p>
<p><strong>21</strong> Ibid.</p>
<p><br></p>
<p>French painting theorists like Louis Marin or Hubert Damisch in particular have put forward this argument -that painting is a sort of discourse producer that arrives at its own insights. Once it is declared to be able to think it becomes subject-like.</p>
<p>특히 루이 마린(Louis Marin)이나 위베르 다미쉬(Hubert Damisch)와 같은 프랑스 회화 이론가들은 회화가 일종의 담론 생산자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것이 사고할 수 있다고 선언되면 그것은 주체와 같이 된다.<br></p>
<p><strong>VI Painting as a Highly Valuable Quasi-Person</strong></p>
<p>높은 가치의 유사-인물로서의 회화<br></p>
<p>But how does painting's capacity to evoke the sense of a subject-like force--its power to suggest that it actually operates like a person--relate to the value that is attributed to it?<strong>22</strong></p>
<p>그러나 주체와 같은 힘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의 능력, 즉 그것이 실제로 사람처럼 작동한다고 암시하는 능력은 그것에 귀속되는 가치와 어떤 관련이 있나?<br></p>
<p>For an artwork to be considered valuable, it first of all has to be attributable to an author--one could say that it thereby gets loaded with intentionality. This process gets intensified in the case of the indexical signs of paintings. Here, someone has left her traces (even if mechanically produced, this suggestion of a handwriting persists) and this enhances the impression of an intentional artwork, of an artwork that itself has agency. While all artworks have to function as an index of the one who brought them into existence in order for value to be attributed to them, painting seems to go further by suggesting that it is a quasi-person. Or to put this slightly differently: painting is particularly well equipped to satisfy the longing for substance in value. It indeed seems to demonstrate how value is founded in something concrete- the living labor of the artist.</p>
<p>예술 작품이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우선 작가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그렇게 되면 의도성이 짙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회화의 지표적 기호의 경우 더욱 심화된다. 여기에 누군가가 그녀의 흔적을 남겼고(기계적으로 만들어졌더라도 이러한 필체의 암시는 지속됨) 의도적인 예술 작품, 그 자체로 주체가 있는 작품의 인상을 강화한다. 모든 작품은 작품을 존재하게 한 사람에 대한 지표로 기능해야 가치가 부여되지만, 회화는 그것을 유사-인물이라고 암시함으로써 더 나아가는 것 같다. 또는 이것을 약간 다르게 표현하면, 회화는 특히 가치있는 실체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잘 갖추어져 있다. 그것은 예술가의 살아있는 노동이라는 구체적인 것에서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p>
<p><strong>22</strong> 1'm not distinguishing between symbolic and economic value here on purpose. I am referring to value in the sense of the place where social relevance is attributed to an artwork. All the claims that have been made for painting constitute its symbolic value. While symbolic value does not automatically get translated into economic value, it is never the precondition for economic value to occur.<br></p>
<p>여기서 일부러 상징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작품이 사회적 관련성을 부여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회화에 대한 모든 주장은 그 상징적 가치를 구성한다. 상징적 가치가 자동적으로 경제적 가치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경제적 가치가 발생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결코 아니다.</p>
<p>Let's recall how Karl Marx conceptualized value. While it is certainly true that his reflections on value were bound to the commodity and that he did not consider artworks commodities of a special kind, his notion of value has two undeniable advantages: it does not confound value and price, and therefore it prevents us from equating the value of an artwork with its market value.23 Even more importantly, Marx insisted on the relational, metonymic quality of value, thereby reminding us that value has no substance and is always elsewhere.<br></p>
<p>칼 마르크스가 어떻게 가치를 개념화 했는지 떠올려보자. 가치에 대한 그의 성찰이 상품에 한정되어 있고, 그가 예술품을 특별한 종류의 상품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의 가치 개념은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이점이 있다. 그것은 가치와 가격을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예술 작품의 가치를 시장 가치와 동일시하지 못하게 한다. 23 더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관계형의 환유적 가치를 주장함으로써 가치는 실체가 없고 항상 다른 곳에 있음을 상기시킨다.</p>
<p></p>
<p>Indeed, Marx on the one hand emphasized that no commodity is valuable in itself, that value is a "purely social" phenomenon.? This is also true for artworks: No artwork is valuable per se-its value is the result of an ongoing and never-ending social negotiation. If the symbolic value of Damien Hirst's work, for instance, is considered questionable because of his general strategic attitude towards the market, then his overall project will start to lack credibility and its price will eventually fall. But the worth of his practice is never fixed and is always open for reconsideration.</p>
<p>실제로, 마르크스는 한편으로 어떤 상품도 그 자체로 가치가 없으며 그 가치는 "순수한 사회적"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예술 작품에도 해당된다. 예술 작품 자체는 가치가 없다. 그 가치는 지속적이고 끝없는 사회적 협상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의 상징적 가치가 시장에 대한 일반적인 전략적 태도 때문에 의심스럽다면, 그의 전반적인 프로젝트는 신뢰성이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고, 가격은 결국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천의 가치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항상 재고할 여지가 있다.</p>
<p>On other hand, Marx pointed to how value represents “the diture of human labor in general.”25 This would mean that value eclipses concrete labor and turns it into its opposite-abstract human labor,."26 Now, painting seems to be one of the last places where the desire for a concrete foundation of value <em>seemingly</em> gets fulfilled. <u>Not only does it generate the illusionary impression that it is possible to grasp a fiber of the lived labor that was mobilized for it, but it moreover promises the existence of an imaginary place where labor actually remains private and concrete, detectable in the concrete materiality of its surface and the gestures that it displays</u>. The process of labor is not hidden but seemingly exposed, as if the lived labor of its author was something we could hold onto, as if it had not been transformed into "objectified labor" (vergegenständlichte Arbeit, Marx) during the process of exchange. Painting's capacity to appear particulary saturated with the lifetime of its author makes it the ideal candidate for value production.<br></p>
<p>반면에, 마르크스는 가치가 어떻게 "인간 노동의 일반의 전환"을 나타내는지를 지적했다. 25 이것은 가치가 구체적인 노동을 가리고 그것을 그와 반대되는 추상적인 인간 노동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26 이제 그회화는 가치의 구체적인 기초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는 최후의 장소 중 하나인 것 같다. 그것은 그것을 위해 동원된 살아있는 노동의 근성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적인 인상을 줄 뿐만아니라, 노동이 사적이고 구체적으로 남아있는 상상의 장소의 존재를 약속하며, 이는 표면의 구체적인 물질성과 그것이 나타내는 제스처에서 감지할 수 있다. 노동의 과정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마치 작가의 산 노동이 교환 과정에서 "객관화된 노동"(vergegenständlichte Arbeit, Marx)으로 변형되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붙잡을 수 있다. 특히 작가의 일생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회화의 능력은 가치 생산을 위한 이상적인 후보가 된다.</p>
<p><strong>23</strong> Pierre Bourdieu's notion of "symbolic value" allows us to theorize this non-equation, There can be symbolic value without market value.</p>
<p>피에르 부르디외의 "상징적 가치"개념은 우리가이 방정식을 이론화할 수 있게 해준다. 시장 가치가 없는 상징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p>
<p><strong>24</strong> “Turn and examine a single commodity, by itself, as we will, yet insofar as it remains an object of value, it seems impossible to grasp it. If, however we bear in mind that the value of commodities has a purely social reality, and that they acquire this reality only insofar as they are expressions or embodiments of one identical social substance, viz., human labour, it follows as a matter of course, that value can only manifest itself in the social relation of commodity to commodity," Karl Marx,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1, Part 1:'The Process of Capitalist Production, ed, Friedrich Engels, trans, Ernest Untermann (New York: Cosimo, 2007), 55.</p>
<p>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의 상품을 돌려보고 검토해 보지만, 그것이 가치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상품의 가치가 순전히 사회적 현실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이 하나의 동일한 사회적 실체, 즉 인간 노동의 표현이나 구체화인 한에서만이 현실을 획득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그 가치는 상품과 상품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p>
<p><strong>25</strong> But the value of a commodity represents human labour in the abstract, the expenditure of human labour in general.," Ibid., 51.</p>
<p>그러나 상품의 가치는 추상적으로 인간 노동, 일반적으로 인간 노동의 지출을 나타낸다.</p>
<p><strong>26</strong> Hence, the second peculiarity of the equivalent form is, that concrete labour becomes the form under which its opposite, abstract human labour, manifests itself" Ibid., 67,</p>
<p>따라서 동등한 형태의 두 번째 특성은 구체적인 노동이 그 반대의 추상적인 인간 노동이 나타나는 형태가된다는 것이다.<br></p>
<p>It is important to note that this search for value within lived labor gets even more pronounced in the current context of ongoing devalorization. One of the effects of the 2008 financial crisis Is that more and more desperate searches for value take place. The belief in the "personality" of the artwork and painting in particular is of course not a solution to the crisis, it is rather a way of both delaying and extending it.</p>
<p>살아있는 노동 내에서 가치에 대한 이러한 탐색은 평가 절하가 진행 중인 현재 맥락에서 훨씬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영향 중 하나는 가치에 대한 절박한 탐색이 점점 더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작품과 회화의 '성격'에 대한 믿음은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를 늦추고 확장하는 방식이다.</p>
<p><u>Let me conclude by saying that the topos of painting as a quasi-person has historically turned up in many different guises-starting from painters themselves, who have either seriously (like Francis Bacon or Charline von Heyl) or ironically (Albert Oehlen) referred to the idea that painting tells them what to do,? </u>The belief in the self-activity of painting is one of its central myths, a myth that is of course closely interwoven with the experience of production. I have mentioned already how several French art historians like Marin or Damisch have made a slightly different claim for a metapictorial “thinking* of paintings, demonstrating how it is able to produce its own discourse,28 While I wouldn't deny the possibility that a painting can occasionally deliver its own interpretation, I find it nevertheless important to realize that by claiming agency for painting (or for artworks in general), by treating them as quasi-persons, as I have aimed to show here that we tend to do, we become somewhat implicated in the process of value attribution, a process that has in any case already been fired up by our propositions regarding the nature of the artwork.</p>
<p></p>
<p>유사-인물로서의 회화적 위상은 역사적으로 화가들--프란시스 베이컨이나 샬린 폰 헤일처럼, 또는 아이러니하게도 알버트 오흘렌 처럼 그림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하는지 말해준다고 말한 화가들--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회화의 자기 활동에 대한 믿음은 회화의 중심 신화 중 하나이며, 이는 물론 생산 경험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신화다. 나는 Marin이나 Damisch와 같은 몇몇 프랑스 미술사가들이 어떻게 회화에 대한 은유적 “사고*”에 대해 약간 다른 주장을 했는지,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언급했다. 회화는 때때로 그 자체의 해석을 전달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우리가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회화(또는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에 대한)에 대한 대리인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을 유사-인물로 취급함으로써, 우리는 가치 귀속 과정에 다소 연루되어 있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예술 작품의 본질에 관한 우리의 제안에 의해 이미 촉발된 과정이다.</p>
<p><strong>27</strong> Francis Bacon: "I find that if I am on my own I can allow the paint to dictate to me." David Sylvester, Interviews with Francis Bacon (London: Thames & Hudson, 1988), 194. Charline von Heyl: "For me, what makes a painting is a mixture of authority and freedom, where it really just wants to be itself, where there is no justification, or explanation, or anything like that. Where it's just what it is for whatever reason." Claire Barliant and Christopher Turner, "Painting Paradox," Modern Painter (Summer 2009): 45. Albert Oehlen: "When I step into the room, I face them- which is extremely unpleasant. Each one shoots me a dirty look, as if to say, you idiot, you loser, you'll never make it." Albert Oehlen, interview by Eva Karcher, Süddeutsche Zeitung, October 9-10, 2010; trans. my own. In Corinna Bela’s documentary Gerard Richter Painting (2011), Richter jokingly says that his paintings do want they want.</p>
<p>프란시스 베이컨 : "만약 내가 혼자라면 페인트가 나에게 지시하도록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David Sylvester), Francis Bacon과의 인터뷰(London: Thames & Hudson, 1988), 194.</p>
<p>Charline von Heyl: "나에게 있어 그림을 만드는 것은 권위와 자유가 혼합된 것입니다. 어떤 정당화도, 설명도, 그런 것도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냥 있는 그대로입니다." Claire Barliant와 Christopher Turner, "Painting Paradox," Modern Painter(2009년 여름): 45.</p>
<p>Albert Oehlen: "내가 방에 들어갈 때, 나는 그것들을 마주한다. 그것은 매우 불쾌하다. 말하자면, 이 바보야, 이 패자야, 넌 절대 해내지 못할 거야." Albert Oehlen, Eva Karcher의 인터뷰, Süddeutsche Zeitung, 2010년 10월 9-10일; Corinna Bela의 다큐멘터리 Gerard Richter Painting(2011)에서 Richter는 농담으로 그의 그림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합니다.</p>
<p><strong>28</strong> See Louis Marin on Nicolas Poussin's The Arcadian Shepards: "The painting in the Louvre is a representation of the process of narrative representation associated with history." Louis Marin, To Destroy Painting, trans. Mette Hjort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1995), 26.</p>
<p>"루브르 박물관의 그림은 역사와 관련된 내러티브 표현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p>
<h3>
<br>(은비)</h3>
<p></p>
<p><strong>Questions for Isabelle Graw</strong></p>
<p>Peter Geimer</p>
<p>Isabelle Graw를 위한 질문들</p>
<p>피터 가이머<br></p>
<p>What I find interesting about your thesis is that you do not work with the term "indexicality" in its widely understood sense, but, instead, you mobilize it to mean the exact opposite, In the theory of photography, index, trace, and reprint count as modes by which an object registers itself physically. These do not necessarily require the presence of an author, and it is precisely through this quality that they open up an empty space of subjectivity and intentionality (somewhat like <strong>1</strong> André Bazin’s statements about photography being the first of the arts to derive an advantage from man's absence), ' Your understanding of indexicality- transferred to painting:-implies just the opposite; the promise of value being awarded by the visible or imagined presence of an author. You use the definition of painting as a "form of production of signs that is experienced as highly personalized" in place of the modernist and substantialist concept, and suggest this as an alternative trait of painting.</p>
<p>제가 당신의 논문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보편적 의미에서 "지표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 이론에서, 색인index, 흔적trace, 그리고 재인화reprint가 물체가 물리적으로 자신을 등록하는 모드로써 사용되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반드시 작가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정확히 이러한 자질을 통해 주관성과 의도성의 빈 공간을 엽니다(사진술이 인간의 부재에서 이점을 도출하는 최초의 예술이라는 앙드레 바진André Bazin의 진술과 다소 비슷합니다.), 당신의 지표성에 대한 이해는 - 회화에서 비롯된 - 정반대를 의미합니다; 작가라는 가시적이고 상상적 존재에 의해 부여되는 가치의 약속. 당신은 모더니즘과 실존주의 개념 대신 "고도로 개인화된 흔적(signs)(=행위자를 특정할 수 있는)의 생산 형태"로서 회화의 정의를 사용하고, 이것을 회화의 대안적 특성으로 제시합니다.</p>
<p></p>
<p>Here, I begin my two questions: Firstly, in this transfer, what happened to the condition, central to the Peircean definition, of physical contact between sign and signified? If mechanical means, printing, and the involvement of third parties have been employed in painting production for quite Some time now (as in your examples of Andy Warhol and Wade Guyton), then Peirce's central motif of direct physical contact has simply been canceled. Peirce also understood indexicality as more than mere construct or pure attribution, convention, or sug gestion, but instead as a real existent physical connection (in his example, something like that between the path of the sun and the analog shadow cast on the sundial, or between the wind's direction and the analog movement of the weather vane). What exactly do you gain in this argument by taking on Peirce's concept of indexicality, though in doing so varying one of his central conditions?</p>
<p>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이 이전에 Peirce 정의의 핵심인 기호와 기호의 의미의 물리적 접촉 조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기계적 수단, 인쇄 및 제 3자의 개입이 그림 제작에 꽤 오랫동안 사용돼 왔다면,(앤디 워홀과 웨이드 가이튼의 예시와 같이) Peirce의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라는 핵심 모티브는 단순하게 파기됩니다. Peirce는 또한 지표성을 실존하는 물리적 연결(예로, 태양의 경로와 해시계에 드리워진 아날로그 그림자 사이의 연결, 또는 바람의 방향과 풍향계의 아날로그 움직임 사이)으로 이해하는 대신에, 단순한 구성 또는 순수한 귀속, 관습 또는 암시 이상으로 이해했습니다. 당신은 Peirce의 핵심 조건 중 하나를 변화시키면서 지표성의 개념을 받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에서 정확히 무엇을 얻을 수 있나요?</p>
<p><br><strong>1</strong> André Bazin, "The Ontology of the Photographic Image," Film Quarterly 13, no. 4 (Summer 1960): 4-9</p>
<p></p>
<p>I also ask myself whether indexicality in your understanding is in fact specific to the contemporary discourse on painting. Why wouldn't this also be valid for a film or a video, where the camera work or editing can count as visible marks of the producer? (And, as Rosalind E. Krauss showed so well in her essay <strong>2</strong> *Photography's Discursive Spaces: Landscape/View," there have been many art historians who were anxious to establish a conceptualization of authorship and personal style, which is rooted in painting, within the medium of photography as well.) 2 The will to trace subjectivity in art seems to me to be effective in a medium-encompassing way, and not specific to painting.</p>
<p>나는 또한 당신의 이해한 지표성이 사실 회화에 대한 현대 담론에만 국한된 것인지 자문합니다. 카메라 작업이나 편집이 제작자의 가시적 표시로 간주될 수 있는 영화나 비디오에 지표성이 유효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로잘린드 E. 크라우스가 에세이 <strong>2</strong> *Photography's Discursive Spaces: Landscape/View에서 너무나 잘 보여주었듯이, 그림에 기반을 둔 작가성과 개인 양식의 개념화를 사진이라는 매체 내에서 확립하고자 애쓰는 미술사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술에서 주체성을 밝혀내려는 의지가 회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매체를 아우르는 효과적인 방식인 것 같습니다.</p>
<p><br>Secondly, can painting's function of reifying an artist's efforts-as shown in the exhibitions you mentioned-in fact serve to comprehensively explain the lasting painting boom? “Buying artworks indeed comes close to buying people"-however, most of the players do not approach painting from the perspective of potential buyers, but as gallery and museum visitors, curators, critics, or art historians. Would you say that their experiences with art-and even our conversation here-are also effects of economic structures? (Wouldn't that, in turn, be a quite determinist point of view, similar to the essentialist view of the media-specificity of art?)</p>
<p>둘째, 당신이 언급한 전시에서 보여주듯이 예술가의 노력을 구체화하는(가시화하는) 회화의 기능이 지속되는 회화 붐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나요? "예술품을 사는 것은 실제로 사람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그러나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잠재적인 구매자의 관점에서 그림에 접근하지 않고, 갤러리 및 박물관 방문객, 큐레이터, 비평가 또는 미술사학자로서 접근한다. 예술에 대한 그들의 경험-그리고 심지어 여기서의 우리의 대화도- 경제 구조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결국 예술의 미디어 특수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관점과 유사한 상당히 결정론적인 관점이 아닐까요?)</p>
<p><br><strong>2 </strong>Rosalind E. Krauss, "Photography's Discursive Spaces: Landscape/View," Art Journal 42, no. 4 (Winter 1982): 311-19</p>
<p><br></p>
<p><strong>Response to Peter Geimer</strong></p>
<p>Isabelle Graw</p>
<p>Peter Geimer를 위한 답변</p>
<p>Isabelle Graw</p>
<p>It is true that at first glance it may be surprising that I make a claim for Peirce's definition of the index, and this even in light of those forms of painting based on mechanical processes like silk screen-and thereby contradict his central point about physical connection. Although, the mechanical process need not necessarily exclude a moment of physical contact, as seen with Warhol, who cultivated mistakes in his silk screens, or made improvements, or painted over the surface after the fact. All the same, I should likely have stressed the point that I am not adopting the Peircean model one-to-one, but modifying it. Whereas Peirce places the accent on the factual, physical connectedness of the index to its object, I highlight the index’s faculty for evoking this physical connection. In other words, photography-basically the recording of lighting conditions via a chemical process-evokes, or even better, suggests that it is the trace or the reprint of a real object. It is not this print, but much more--it suggests the presence of such a physical connection.<br></p>
<p>언뜻 보기에 내가 Peirce의 색인index에 대한 정의를 주장하는 것에 놀랄 수 있고, 실크 스크린과 같은 기계적인 과정을 기반으로 한 회화의 형태에 비추어 보아도 물리적 연결에 대한 그의 중심 요점과 모순될 수 있다. 비록 기계적인 과정이 반드시 신체 접촉의 순간을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워홀은 실크 스크린에서 실수를 만들거나, 개선하거나, 그 이후에 표면에 페인트를 칠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Peirce의 모델을 일대일로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한다는 점을 강조했어야 했다. Peirce가 해당 대상에 대한 색인index의 사실적, 물리적 연결성에 강조점을 둔 반면, 나는 이러한 물리적 연결을 불러일으키는 색인의 기능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사진술은 기본적으로 화학적 과정을 통해 조명 조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실제 물체의 흔적이나 재인쇄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프린트가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이 그러한 물리적 연결의 존재를 암시합니다.</p>
<p></p>
<p>I attribute a comparable potential for suggestion to the indexical signs in painting, except that here, a physical connection with the artist-subject as its author is evoked. I also consider this valid for every painterly practice that undermines the authority of the author by different means (for example, through non-subjective methods like the readymade, aleatoric procedures, or the delegation of the painterly process to someone else). Here, the avoidance of signature becomes the artist's signature. What do I gain, though, by adopting and modifying Peirce’s concept of indexicality? First of all, a more exact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such a bond between product and person, which is especially tight in painting. But unpainterly practices also lend themselves to being read as traces of the producer. You were right in referring to this with the editing of film. However in painting, this bond between product and person is especially unbreakable, as its signs refer to the producer consistently and not only selectively, like in film. The recourse to a semiotic approach presents the additional advantage of allowing for a media-unspecific understanding of painting, Because, as soon as I understand painting as a form of sign production, I can also pursue the presence of painterly signs in nonpainterly practices or consider expanded forms of painting that go beyond painting and have burst open the narrow confines of the canvas long ago. My model takes this despecification into account and also acknowledges the specific codes of painting.</p>
<p>나는 여기에서 작가로서의 예술가-주체와의 물리적 연결이 환기된다는 점을 제외하고 회화의 지표적 기호에 유사한 암시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나는 또한 이것이 다른 수단으로 작가의 권위를 훼손하는 모든 회화적 관행에 대해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예를 들어, 레디메이드, 우연에 의한 절차 또는 회화적 과정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는 것과 같은 비주관적 방법을 통해). 이 지점에서 서명의 회피는 작가의 서명이 된다. 하지만 Peirce의 지표성 개념을 채택하고 수정함으로써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회화에서 끈끈한, 생산품과 사람간의 유대의 본성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비회화적 관행은 생산자의 흔적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당신이 이것을 필름 편집과 함께 언급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회화에서 이 결과물과 사람 사이의 유대는 특히 깨지지 않는데, 그 기호가 영화에서처럼 선택적으로만 아니라 일관되게 생산자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기호학적 접근에 대한 의존은 회화에 대한 매체 비특정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추가적인 이점을 제공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림을 기호 생산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순간, 비회화적 실천에서 회화적 기호의 존재를 추구하거나 회화를 넘어서 오래 전에 캔버스의 좁은 경계를 터트린 확장된 회화 형식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델은 이러한 탈특이화을 고려하고 또한 페인팅의 구체적인 코드를 인정합니다.</p>
<p>Moreover, the focus on its specific indexicality allows me to better understand the attraction of a painterly practice that deals with images interceded by photographic media, like the early work of Gerard Richter. I believe that the reason for the lasting fascination with this painting form, which numerous artists have taken on, lies in its coordination of the indexicalities of two media: painting and photography.</p>
<p>게다가 그 특정한 지표성에 초점을 맞추면, Gerard Richter의 초기 작업과 같이 사진 매체에 의해 중재된 이미지를 다루는 회화적 실천의 매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용한 이 회화 형식에 계속해서 매료되는 까닭이 회화와 사진이라는 두 매체의 지표성의 조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p>
<p>As paintings of photographs, these images evoke the indexicality characteristic of photography: a reference to life. They are loaded with a sense of the real (Lebenswirklichkeit) as photography, so to speak. However, this is accompanied by an explicit painterly act through Richter's often-invoked blur technique, which not only abstracts the motif, but even further incorporates the painter's person, and this even despite the mechanical look and feel of this painterly blurring. In this way, the photographic element provides the image with a reference to life, which, nonetheless, will be molded by the painter's signature at the end. With Richter, you get both: the reference to reality and the suggestion of the presence of the painter.</p>
<p>사진의 회화로서 이 이미지는 사진의 지표성, 즉 삶에 대한 참조를 불러일으킵니다. 말하자면 사진으로서의 실재감 (Lebenswirklichkeit)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종종 발동되는 리히터의 블러 기법을 통해 노골적인 화가적 행위를 동반하는데, 이는 이 회화적인 흐림의 기계적인 모양과 느낌에도 불구하고 모티프를 추상화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화가 자신을 더욱 통합시킨다. 이런 식으로, 사진적 요소는 이미지에 삶에 대한 참조를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화가의 서명에 의해 형성됩니다. 리히터를 사용하면, 현실과 화가의 존재에 대한 암시 둘 다 얻을 수 있습니다.</p>
<p>Now, it is certainly true that not only painting but art in general is marked by the desire for traces of subjectivity. All artworks can be described as "indexes of agency" (Alfred Gell), though only in painting are aesthetics and subjectivity strongly interconnected. In this context, one need only recall Hegel’s "principle of finite and inherently infinite subjectivity," which would be groundbreaking for painting and allow us to feel more at home and somewhat familiar there (einheimischer). Painting's orientation towards subjectivity--subjectivity in the sense of a general capacity-leads to a problematic, anthropomorphic projection. Despite this, it is still important to maintain that it is painting (and not sculpture) that Hegel used as an example here; that it was painting, after all, which provided him with an occasion and reason for such projection, In my opinion, the unique dynamic developed by paint on a surface the understanding that, here, we are also dealing with a model of subjectivity in the sense of an independent, mental life.<br>이제 회화뿐만 아니라 미술 전반에 걸쳐서 주관성의 흔적에 대한 욕구가 두드러지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모든 작품은 "행위의 지표"(Alfred Gell)로 설명될 수 있지만, 회화에서만 미학과 주관성이 강하게 상호 연결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헤겔의 "유한하고 본질적으로 무한한 주체성의 원리"를 회상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는 회화에 획기적인 것이 되고 우리가 집에 있듯 그곳에서 더 편안하고 친숙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einheimischer). 주관성에 대한 회화의 지향성(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주관성)은 문제적이고 의인화된 투영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헤겔이 예시로 사용한 것은 (조각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합니다; 결국 그에게 그러한 예상의 기회와 이유를 제공한 것은 회화였습니다. 제 생각에, 표면의 페인트가 만드는 독특한 역동성은 또한 여기에서 우리가 독립적이고 정신적인 삶의 의미에서 주관성의 모델을 다루고 있다는 이해를 발전시켰습니다</p>
<p>Coming to your last point—of course, not everyone approaches painting as a potential buyer. But, if we understand painting as a specific form of sign production, perhaps it has an especially intense way of misleading its receivers to read its products as synonyms of their producers? There are certainly other historical explanations for its rise to a "success medium” (Niklas Luhmann), which I have cited, like the mobility of the work on canvas or the comparably low production costs, for example. Painting seems to lend itself especially well to being fetishized and effectively possessed. This also explains its lasting attraction from the viewpoint of artists.</p>
<p>마지막 요점에 도달하면 물론 모든 사람이 잠재적 구매자로 그림에 접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화를 기호 생산의 특정 형태로 이해한다면, 아마 수용자들로 하여금 창작자의 유의어로서 창작물을 읽도록 오해하게 하는 강력한 방법이지 않을까요? 회화의 “성공 매체”(Niklas Luhmann)로써의 부상에 대한 다른 역사적 서술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캔버스 작업의 이동성 또는 비교적 낮은 생산 비용과 같이 제가 인용한 바 있습니다. 회화는 자신에게 특히 물성화되고 효과적으로 소유되는 특징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술가의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매력적인 이유를 설명합니다.</p>
<p>We have both thought about painting today, no doubt, as a consequence of the most recent economic and symbolic painting boom. In fact, painting started to be considered (seemingly) unproblematic since the late 1990s at least. There is no longer any pressure for justification. You could say that this situation was (involuntarily) prepared in the early 1980s by artists like Albert Oehlen or Martin Kippenberger. At that time, it was absolutely necessary to attack painting, even by means of its own tools, in order to grasp and drain the medium as a questionable belief system. Today, many artists consider this "painting against painting* that followed modernism's belief in painting's essence to be finished and resolved. Instead, in many exhibitions and in the statements of young painters, the mythical belief in Painting is revitalized, also in the sense of a self-acting entity.</p>
<p>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최근의 경제적이고 상징적인 회화 붐의 결과로서 오늘날의 회화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실, 회화는 적어도 1990년대 후반부터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습니다. 타당성에 대한 압박은 더 이상 없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1980년대 초에 알베르트 올렌이나 마틴 키펜버거 같은 예술가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준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의심스러운 믿음 체계로서 매체를 파악하고 빼내기 위하여 심지어 회화 자체의 도구일지라도 회화에 대한 공격은 불가피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모더니즘의 신념을 따랐던 이 *'반회화'가 결되고 해결된 것으로 여긴다. 대신 많은 전시회와 젊은 화가들의 진술에서, 스스로 행동하는 독립체라는 감각에서 또한 회화에 대한 신화적 믿음이 다시 활성화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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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 have of course contributed to this rehabilitation of painting in my own work, when for instance relating Kippenberger’s paintings to institutional critique or when interpreting his seemingly expressive gestures as a form of conceptual expression. Instead of not having any more problems with painting, I want to keep discussing it as a "constellation of problems" (Problem-zusammenhang, Theodor W. Adorno) in my examination of the medium's specific indexicality, and, consequently, as something that is- like other art forms-problematic and markedly questionable per se. This is, not least of all, due to painting’s inherent personalization.</p>
<p>물론 저는 키펜버거의 그림을 제도적 비평과 연관 키거나 그의 작업에서 겉보기에 표현적인 제스처를 개념적 표현으로 해석할 때, 자기 자신의 소유물로써의 회화의 재활에 기여했습니다. 회화에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기 않는 대신, 저는 계속해서 매체 특정 지표성을 조사하며 ”문제의 별자리“(문제-맥락Problem-zusammenhang, Theodor W. Adorno)로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다른 예술 형식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문제가 있고 분명히 의심스러운 것으로서 회화에 대해 논의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회화에 내재하는 개인화 때문입니다.</p>
작성
practice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Quasi-Person 유사-인물
indexicality 지표성
indexes of agency 대리의 지표
signs 흔적
indexical signs 인덱스 부호
Subject 주체
highly valuable 이라는 수식이 경제 용어를 암시하는 것인지 아닌지
작가님들 덕분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국문으로 번역하실 때 적절한 단어가 없거나 모호해서 어려우셨을 것 같은데,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 분량도 잘 번역해보겠습니다 : )